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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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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질문일지는 몰라도 먼저 양심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이 먼저 있어야 하겠다.
너무 사전적인 대답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양심이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는 도덕적 의식이요,
일종의 마음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기능은 모든 피조물중에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값진 선물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오직 인간들에게만 당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인 양심을 주셨다.
그리고 그 양심이 항상 깨끗한 보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양심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 되는 율법의 거울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하므로 양심은 크게 손상을 받았고 타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사람들의 양심이 악하다고 말하였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양심이 악하다면 인간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에 물로서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였다.
인간들의 양심이 악하여 졌기 때문에 더 무엇을 기대 할 수가 있었겠는가?
양심은 마음의 눈과 같은 것인데 양심이 더러운 것은 눈이 어두운 것과 같아서 모든 것이 어두운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더러워진 인간의 양심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화인 맞은 양심과 더러운 양심과 악한 양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양심의 악을 깨닫고”(히 10:22)
반대로 성경은 선한 양심에 대하여도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히 13:18)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6)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집총문제와 병역문제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우리들의 양심이 얼마나 타락하고 악한 양심을 갖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살인무기를 드는 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양심,
온갖 악한 모양의 훈련과 교습을 받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양심,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주신 양심의 자유를 구속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인간의 법률로 짓밟고 있는 단체에 참가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타락한 양심을 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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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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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시는 참된 증인의 권고 가운데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라는 말씀이 있다.
왜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권고를 하셨는지, 그것은 라오디게아 백성들의 마음의 눈이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타락한 양심과 순결하지 못한 양심을 가진채 재림을 기다리는
많은 재림성도들에게 더욱 양심을 순결 하게 하여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안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각성이 더 큰 문제이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계 3:17. 라는 태도는 참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양심을 순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거울을 가지고 자신의 양심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순결하신 말씀과 율법의 거울을 통하여 각자의 양심들을 비추어 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양심이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당대의 선조들은 얼마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비록 아담 하와의 범죄로 인간의 마음이 타락하였지만 그들의 양심은 오늘날에 비하여 현저하게 깨끗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시드는 꽃과 떨어지는 잎 가운데서 최초의 쇠퇴의 징조를 목격하고 아담과 그의 반려자는
오늘날 사람들이 죽은 자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더 깊이 슬퍼하였다.”(부조, 61-62)
“홍수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땅 위에 떨어진 나무 잎사귀들을 볼 때 깊은 슬픔에 잠기었다.
오늘날 우리가 친구가 죽었을 때 슬퍼하듯 그들은 그 낙엽들을 보고 애도하였다.”(4영적 155).
그들은 죄의 결과로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에서도 죄의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거듭남의 경험을 한 사도바울의 양심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는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에 살인무기를 드는 일과 전쟁과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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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성도들의 양심은 더욱 개발되어야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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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관련하여 재림성도들의 양심은 말씀에 비추어 더욱 개발되어야 한다.
특히 양심이란 도덕적인 품성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계에서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은 전쟁이나 살인무기,
더 나아가서는 군대에 참여하는 문제까지 그들의 양심은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양심을 더럽히기보다는 투옥과 비난, 빈곤, 그 어떤 고난이라도 피하지 않고 그들은 양심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최고의 진리를 자랑하는 재림교회는 어떤가?
살인무기인 집총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양심의 자유에 맡겨버리고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과
군대에 참여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로 가르치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을 시험가운데로 몰아넣고 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청년들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수많은 청년들을 가혹하고 무서운 시험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이 사단의 권세에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양심을 더럽혀 일생을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지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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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왕국의 병역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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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1-2)
이처럼 침례요한이 선포한 왕국은 은혜의 왕국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기별이 당신의 은혜의 왕국을 공포하였던 것처럼”(소망, 234)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자들은 모두 은혜의 왕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 속하기에 앞서서 하늘왕국의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세상나라의 선한 법들은 충성으로 순종해야 하나 하늘왕국의 법과 정신에 어긋나는 세상의 법들은 순종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나라의 군대와 전쟁은 은혜의 왕국에서는 전혀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요, 은혜의 왕국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은혜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9-44)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되어야 하며 가슴에 새겨야 할 율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 10:16)고 하신 법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심이 십계명의 정신이요 율법의 원칙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정신이 없는 문자적인 율법준수는 무의미한 것이요 무능력한 것이다.
은혜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이미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생애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정확하게 구별 하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 22:21)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나라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에 은혜의 왕국의 정신과 반대되는
세상나라의 전쟁에 동참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이 세상나라는 나그네의 여행에 속한 나라일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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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전쟁 및 폭력에 참여할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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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오늘날 우리들이 본 받아야할 생애의 모본이 된다.
은혜의 왕국에 왕이신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분이 계시던 유대나라의 형편이 어떠하였는가?
예수님은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려는 유대민족의 정서에 전혀 반응하시지 않으셨고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음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가르쳐야할 원칙과 표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한 마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은혜의 왕국시대인 오늘날 세상나라의 군대(전쟁의 수단)와 전쟁은 사단에게 속하여 있다.
우리는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계발시켜야한다.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사업은 반대를 받음이 없이 비난과 중상을 일으킴이 없이 성취될 수 없다.
사단은 진리가 나타날 때 불편함을 느끼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전쟁수단을 동원하여
진리의 옹호자들을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다.” RH1888.5.8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거기에는 계속적으로 양심을 어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십계명은 모든 의롭고 선한 법률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국가의 모든 선한 법률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통치자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율법과 상치될 때에는, 우리가 가부간 결정해야 할 유일의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사람에게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1증언, 361-362)
“땅에서 나온 권세들이 매우 강렬하게 격동하고 있다. 전쟁과 유혈이 그 결과이다.
도덕적 분위기는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는 일들로 오염되어 있다. 투쟁의 정신이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도처에 편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정신과 공명정대하지 않은 관계에 사로잡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영이 그들을 사로잡았는지 분별하지 못한다.”-8증언, 248-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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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하는 양심의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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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자유는 양심과 함께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이요 특권이다.
이 자유는 어떤 나라도 어떤 권세자도 심지어 교회도 줄 수 없으며 막아서도 안 된다.
어떤 권세자라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자유를 착취하거나 구속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용인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교회가 말하는 양심의 자유라는 말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이 옳고 그르며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분별하여 가르쳐야 할 파숫꾼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런 다음 순종 불순종은 개인의 자유에 맡겨야 하며 교회에는 책임이 없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불순종을 고집하는 자들은
복음의 질서를 좇아 행정적인 처리를 해야하며 연약한자들에게는 믿음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살인무기를 들고 살인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유를
구속하는 단체에 참여하는 일을 자유라고 선포할 수 있는 권리가 교회에게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정병들에게 살인무기를, 영혼을 구원하기위하여 생명까지도 희생하신 주님의 희생을 보면서도 살인하는 훈련과 전술을 배우며,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군대의 조직에 참가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안목을 가졌다면 얼마나 양심이 무디어져 있는가?
우리의 청년들이 군대가 아닌 다른 어떤 단체에 참여하여 총을 잡고 살인 훈련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야단을 치며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군대에서 하는 일은 죄가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언행이나 침묵이나 또는 참석을 통하여 죄를 시인해서는 안 된다.”-소망, 152.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사도의 권면을 교회가 받아드린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집총을 하며 살인 훈련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는 일을 교회가 양심의 자유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군대나 전쟁 중에서의 범죄는 죄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죄가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
다만 빛을 받지 못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하여 심판을 참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대의 교회는 그 빛을 받았기 때문에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회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던 양심문제인 평화주의 원칙을 최고의 진리를 갖고있는 재림교회가 순종하지 못한 채 개인의 양심으로
미루고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와 살인무기를 잡는 일에 묵인한다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직무유기로 선고 받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교회의 직무유기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성을 이 땅에 드러내야 할 재림교회의 청년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일과 살인무기를 잡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렇다면 에스겔에게 주어진 경고를 교회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 33:7-9)
군대와 전쟁 그리고 살인무기를 잡는 일은 은혜의 왕국에서는 전혀 용납될 수 없는 법이요,
은혜의 왕국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법이다.
“사단은 전쟁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의 가장 악한 감정을 자극하며
전쟁의 희생자들을 죄악과 유혈 속으로 영원히 쓸어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라가 다른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도록 자극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날에 설 준비를 갖추는 사업에서 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쟁투, 589.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공사(公私)간의 범죄가 이 금령 안에 포함되어 있다.
여덟째 계명은 유괴(誘拐)와 노예 매매를 정죄하고 정복을 위한 전쟁을 금하고 있다.”-부조와 선지자, 308-309.
이런 말씀들이 우리의 양심을 울리지 못한다면 안약을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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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과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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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가름하는 도덕적 의식이 양심인데 도덕적 의식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양심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된다.
오늘날 도덕적인 의식이 잘못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도덕적 의식을 고치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한다.
도덕적인 의식이 바뀌고 양심을 계발 시키는 것을 우리는 개혁이라고 부른다.
무엇으로 양심을 개혁하고 우리의 낮은 도덕적 의식을 높일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연구하므로 사상과 이론과 습관과 제도가 바꾸어져야 한다.
“신앙 부흥과 개혁 사업은 성령의 조력을 힘입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 부흥과 개혁 사업은 별개의 것이다. 신앙 부흥이란 영적 생애를 소생 및 부흥시키는 것이며
정신력과 마음의 힘을 일깨워주고 영적 사망에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 사업은 재조직, 사상과 이론의 변화 및 습관과 제도의 개선을 뜻하는 것이다.
개혁 사업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앙 부흥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 한 의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1기별, 128)
교회란 여러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믿고 있는 진리와 율법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원칙들은 모든 성도들의 도덕적 의식을 판가름하는 양심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서
일개 개인의 양심의 기준이 되고 그 교회의 도덕적인 의식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마치 재림교회가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을 율법과 진리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의 도덕적인 의식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때에
양심의 심한 가책과 함께 범죄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우리주님이 새롭게 계명을 선포하신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9-44)는 말씀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는 말씀은 개인의 양심이기 전에 한교단인 재림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로 받아 들여 원칙으로 삼아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할 진리인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의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아름답게 그리고 선하게 개혁시켜 나가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정에서, 언론에서 우리의 진리와 소망에 대한 확실한 진리가
말씀으로 순결해진 젊은 청년들의 양심의 고백을 통하여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의 용기있는 믿음의 변호들이 메스컴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될 때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 했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듣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 땅에 환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공공연히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징개와 책벌이 있는 것처럼 이 주제도 같은 원칙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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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적인 개혁이 요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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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혼들에게 참된 양심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군대라는 무서운 조직에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살인무기를 드는 것을 방관하므로 양심을 더럽히고 진리의 원칙과는 거리가 먼 안식일을 준수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책임을 교회는 느끼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며 에스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순종하지 않으므로 그와 같은 결과가 이르러 온것을 발견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교회의 세속화와 청년들의
타락의 원인이 무엇임을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므로 양심의 악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금 믿음으로 율법의 표준을 높이고 선한 양심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부흥의 물결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개혁은 단호한 결심으로 일어나야 하나 그것은 성령의 깊은 감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개혁은 깊은 회개와 고백이 동반해야 하며 교단적인 개혁운동이 먼저 일어나야 할 것으로 믿는다.
결코 개인들의 양심의 자유라는 말 따위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는 어느 한두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닌 모든 사람들, 아니 전세계의 재림신도들이 당하는 일들에 대하여
아직도 확실한 원칙과 정의를 내리지 않고 개인적인 양심문제라고 말한다면 이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살인무기인 집총을 하는 일이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교회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하며, 군대에 참여하여
우리의 원칙과 신앙을 고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참가유무를 어느 이단 교회와 같이 밝힌 후에 선택은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것이다.
아직도 교회는 이와 같은 확실한 원칙과 표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애매한 비무장 원칙을 제시하면서 마치 이 문제는 취사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취급해 버린다.
군대조직에 참여하는 일이 말씀의 원칙과 양심에 문제가 없고 살인무기를 드는 일이 범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교회의 앞날은 암담하다.
만약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살인무기를 들고 거룩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조직 속에서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는 기회주의적인 신앙과 행동들이 교회에서 용인된다면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교회는 영혼들에게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주어야하고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이 자유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하여서였고 또 어떻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2-33)고 하셨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6-18)고 하셨다.
이처럼 선한 양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자유인이 아니다.
우리의 선한양심의 자유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는 분명 선의 원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양심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한양심에 의하여 순종하지 않고 양심의 지시를 무시한다면 성령을 거스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요, 결과적으로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종함을 받는 자에게 종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재림교회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든 영혼들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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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재림성도들의 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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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의 각종 진리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퀘이커교도들의 진리인 ‘전쟁 및 어떤 폭력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원칙, 즉 평화주의’ 을 받아들였다.
1864년 미국남북전쟁시 교회는 이와 같은 원칙을 다시 확인하였다.
교회가 병역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당국자에게 보낸 선언문이 있다.(1865년3월7일자의 리뷰 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재림교회는 이 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864년 미국남북전쟁당시 재림교회는 병역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당국자에게 보내는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865년3월7일자의 리뷰 지에 기록된 내용임.)
(1)“군인들은 주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다.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군인들은 싸우는 것이 일 중의 막중한 임무일 것이며, 저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그 날의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없는 주둔지나 들에서 보낼 것이다.”
(2)“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의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라고 말한다.
살인하는 것은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인들은 이 교훈을 실제적으로 거역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 -(마 19:17)
(3)“‘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그리고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고전 7:15;고후 10:4).
복음은 우리에게 전쟁무기를 들도록 허락하지 않으나, 우리에게 성령의 ‘검’을 허락하셨다.”
(4)“우리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였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6).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에 속한 전쟁에 참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가장 힘있는 증거가 된다.”
(5)“우리는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구세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우리가 타인의 육체에 해를 가하면서 이 명령을 따를 수 있는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 8:9)”
(6)“우리의 사업은 주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사람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로다’(눅 9:56)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구원하도록 보내신다면 그들을 멸하도록 우리를 보내는 영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어떤 영에 속한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7)“신약의 명령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고 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취해야만 할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과연 이 성경절이 전쟁터에서 이해될 수 있겠는가?”
(8)“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을 때,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었다(마 26:52).
만일 주님께서 사도에게 검을 꽂으라고 명령하셨다면 분명히 그의 추종자들이 다시 검을 취해야 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비록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싸움을 할지라도 우리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기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에 보내는 선언문에서 당시 재림교회의 신앙양심을 발견 할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언인가?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초기에는 자원하는 지원병으로 군대를 조직하였으나
전쟁이 더욱 치열해 지면서는 지원병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링컨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연합세력에서 벗어난 11개의 주를 대항하는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군대 징병법을 제정하였다.
재림교회는 징병제도로 인해 군대에 부름을 받은 형제들을 권면해야 할 방법을 결정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군대징집법은 교회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당시 정부는 헌법으로 양심적인 이유로 전쟁이나 전쟁무기를 들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비전투원이 될 수 있는 길과 300불을 지불하면 대체군인을 보충할 수 있는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등록된 종교 단체들에게 주어진 법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교회를 조직하는 일에 주저하던 지도자들은 화잇 선지자의 권면을 받아들여 1863년 비로소 교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더욱 심화되었을 때 300불을 지불하는 대체군인 법은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무장 전투원의 혜택은 조직된 종교 단체에게는 허용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의 혜택들은 재림교회가 본래에 가졌던 신앙원칙(평화주의)을 변경시키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때에도 핍박보다는 타협이 더 무서운 사단의 무기임이 입증되었다.
“헌법가운데 양심적으로 무기를 드는 일을 반대하거나 규율과 믿음의 조항으로 이런 행위를 금하는 종교 단체들을 위해
비전투원으로 참여하도록 해주었으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는 아직 이런 법 앞에 어떤 입장도 내놓을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법인 단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근원과 역사, 1권, 322.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적은 무리들에게 징병법은 큰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왔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조를 가졌으며, 그들의 믿음의 깃발은 안식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어떤 것도
군대에서는 존중될 수 없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근원과 역사, 1권, 322.
“1861년 그들은 그들의 첫 번째 조직과 출판소를 등록하였으며 미시간주에 첫 번째 총회 또한 형성되었다.
그 다음 해에 7개 주의 합회가 형성되었으나 대총회가 조직된 것은 전쟁 중이었던 1863년도였다.
조직의 가치는 교회의 내부 일뿐만 아니라 외부 관계에서 금방 드러났다.
만일 조직된 교회가 없었더라면 정부에 하나의 집단으로 알려질 수 없었으며 따라서 비전투원의 원칙을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근원과 역사, 1권, 323.
“헌법 가운데 또 다른 방도로 만일 비전투원이 300달러를 ‘감면세’로 지불한다면 정부는 교대 군인을 보충하기로 하였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 아니었던 많은 이들이 이 계획을 받아들였으며,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 않도록
자금을 일으키기 위해 대중적으로 기부금을 받았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근원과 역사, 1권, 324.
그러나 종교자유의 나라 미국은 전쟁이 오래 계속되는 가운데 재림교회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거세지자 재림교회의 입장은 바뀌어 지기 시작했다.
전쟁의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 전투원이 되는 것을 교회의 원칙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군대문제는 개인의 양심문제로 맡겨 버렸다.
미국의 남북전쟁과 한 차례의 세계1차 대 전쟁 이후 핍박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시 재림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해 버렸다.
“우리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그들의 양심의 확신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조국을 섬길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허락한다.”
스위스, 글랜드, 1923년 1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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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림교회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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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1950년-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나마 비 무장전투원의 원칙과 표준을 준수하기 위하여 젊음을 주님의 제단에 바치는 청년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서는 재림교회는 양심적인 평화주의자로 대표되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군사정권의 압력이 교회에 가해져 왔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신학대학의 운동장이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재림신문 기획 특집에 실린 S.신학대학 역사교수의 글을 이용해본다.
“20여년전만해도 한국사회가 인식하는 대표적인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지난 20여년동안 한국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양심적 집총거부는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에 한국재림교회가 굴복한 중요한 사항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 사회는 한국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더 이상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대표하는 평화 교단으로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증인“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대표하는 평화 교단으로 주목하여 그들에 대한 법률적 배려를 토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추이를 찹찹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는 재림교인은 비단 ㅇㅇ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결과에 대하여 놀랄 필요가 없다. 아니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원칙과 양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1865년3월7일자의 리뷰 지에 공개한 우리의 원칙과 신조를 다시 찾아야 한다.
우리는 비무장 전투원이 아니라 어떠한 전쟁과 폭력, 그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양심이요, 원칙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전쟁을 실례로 들어 전쟁의 참여를 정당화하려고 할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화잇 부인의 어떤 글을 이용하여 반론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무엇이 더 순결한지 또 무엇이 우리의 원칙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남북 전쟁 당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 와서 가장 명분 있는 전쟁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일어난 미국 남북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분 있는 전쟁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
심령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영이요 생명이므로, 그들 속에는 굴복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여호와의 십계명은 모두 의롭고 선한 법률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국가의 모든 선한 법률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통치자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율법과 상치될 때에는, 우리가 가부간 결정해야 할 유일의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사람에게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1증언, 361-362
우리는 비무장이 아니라 절대 ‘평화주의’ 가 우리의 원칙인 것이었다.
1865년3월7일자의 리뷰 지에 공개한 우리의 원칙과 신조는 아직도 진리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 선지자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었더라면 재림교회 안에는 새벽이슬과 같은 재림 청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을 환하게 하였을 것이다.
누가 총칼이 무섭지 않으며 감옥의 음침한 곳을 좋아 할 것인가?
누가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며 좋은 직장을 갖기를 원치 않겠는가?
누가 매맞는 일이 즐거운 일이며 조롱과 비웃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국가보다 우선하여 충성해야 곳이 있으며 분명한 말씀이 있고
선지자의 증언이 있건만 재림교회는 매우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 말씀들을 져버렸다.
군대 문제는 개인의 자유이며 양심적인 문제라고 말하므로 허물과 죄는 개인에게 돌려버리고
교회는 순결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이왕 여호와증인 교회의 말이 나왔으니 한번 비교해 보자.
그 청년들을 강제적으로 군대에 가지 못하도록 교회가 감금하였는가? 그래서 그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는가?
그들은 강제적으로 감옥에 들어가도록 교회로부터 협박을 당하였는가?
그래서 그들은 어쩔수 없이 감옥에 들어갔는가? 아니다.
그들은 양심과 개인의 자유에 의하여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다만 무엇이 원칙이며 올바른 양심인지를 교회는 가르쳤을 것이며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누리도록 청년들에게 믿음을 도와주는 일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양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들의 생각이 옳았고 그리고 또 양심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재림교회도 이와 같은 양심의 자유를 청년들에게 주었어야 하였다.
그러나 재림교회가 청년들에게 허락한 자유는 무엇이었는가?
언약궤를 매어야할 어깨에 총칼을 메는 자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자유,
금요일 해는 서산에 넘어갔으나 목욕은 커녕 땀이 범벅이 된 채 상관의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자유,
안식일 아침은 밝았으나 그들은 안식을 누릴 수 없어 당황하는 자유,
그리고는 한 두 시간 짬을 내어 말씀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유,
성경과 증언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이 자유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인지 교회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1923년 재림교회의 결정이 옳은 판단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그들의 양심의 확신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조국을 섬길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허락한다.”
스위스, 글랜드, 1923년 1월 2일
“우리는 각자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의사록, 36
(대총회장 다니엘스의 발언)
양심의 자유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양심의 자유라는 말을 왜 군대문제에만 적용하는지 반문하고 쉽다.
양심의 자유는 교회가 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이미 주신 자유인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던지 우상을 섬기던지 그것은 인간의 양심이요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유일하게 인간에게 주신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신다.
분명히 우리는 하늘에서 루스벨이 행한 것처럼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영원한 손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양심과 선택의 자유라는 말을 혼돈하여 재림교회는 전쟁에 대한 말씀의 원칙을 버리고 말았다.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개인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자유는
영원한 손실을 당한다는 사실을 말해줄 의무를 교회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십계명을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이지만
교회는 불순종하는 자를 교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원칙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군대문제를 개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맡기는 일은 총칼을 들고 전쟁을 하든지, 사람을 죽이든지,
안식일을 잘 지키던지 지키지 않던지, 방화를 하든지, 재물을 약탈하든지, 전쟁이나 군대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교회는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이니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양심의 음성을 듣는 일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요 순종하는 것이다.
여호와 증인 교회의 청년들은 유사시 전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군대에 참여하는 일을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나아가 살생을 목적으로 하는 총 칼을 드는 일을 양심으로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느끼는 양심의 소리를 재림교회는 정녕 듣지 못하는가?
모든 재림신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양심이 그들보다 깨끗지 못하다면,
재림 교회의 양심과 믿음이 그것이라면 재림교회의 장래에 무엇을 기대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좋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돼지고기도 먹고 예수님을 피조물로 믿고 그들의 진리는 구원이 없는 진리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다. 분명 우리가 믿는 진리는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이다.
그들의 믿는바 진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리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위 이단 교회로 낙인 받은 그들의 양심보다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이 변화되어야 한다. 과거에 세웠던 진리의 원칙을 교회는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그때 진리는 우리들의 믿음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할 것이요, 청년들의 양심은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청년들이 탄생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랄만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법률에 의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짓밟히는 군대사회는 마치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여 일요일을 지키게 하는 일요일 강제법령의 축소판과 같다.
그러나 일요일 강제법령에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시험에(군대와 전쟁) 우리의 양심이 타협하고 머리를 숙인다면 어떻게 그 큰 날에 승리할 수 있겠는가?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렘 12:5)
우리들의 양심은 말씀에 의하여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져야 하며 우리의 믿음은 뜨거운 불에 연단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무엇이 옳은지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거기에는 계속적으로 양심을 어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다른 원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방침과 여론은 그들을 지배하는 행동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선행(善行)의 형식을 취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은 동기에 의하여 지배될 수 없다.
심령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영이요 생명이므로, 그들 속에는
굴복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여호와의 십계명은 모든 의롭고 선한 법률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국가의 모든 선한 법률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통치자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율법과 상치될 때에는, 우리가 가부간 결정해야 할 유일의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사람에게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1증언, 361-362
"땅에서 나온 권세들이 매우 강렬하게 격동하고 있다. 전쟁과 유혈이 그 결과이다.
도덕적 분위기는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는 일들로 오염되어 있다. 투쟁의 정신이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도처에 편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정신과 공명정대하지 않은 관계에 사로잡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영이 그들을 사로잡았는지 분별하지 못한다."8증언, 248-249
"사단은 전쟁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의 가장 악한 감정을 자극하며
전쟁의 희생자들을 죄악과 유혈 속으로 영원히 쓸어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라가 다른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도록 자극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날에 설 준비를 갖추는 사업에서 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쟁투, 589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공사(公私)간의 범죄가 이 금령 안에 포함되어 있다.
여덟째 계명은 유괴(誘拐)와 노예 매매를 정죄하고 정복을 위한 전쟁을 금하고 있다.
이 또한 절도와 강도 행위를 정죄한다."부조, 308-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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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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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원수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명을 살해하려고 할 때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살인무기를 소유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반문 한다.
'반항하지 않을 것이며 싸우지 않을 것인가?' 전쟁과 무기를 잡는 일에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런 가정법을 이용한다.
우리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아울러 믿는 자들에게서 나타나야하는 높은 도덕적 표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믿는 자들에게 깨끗한 양심과 선한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만일 양심이 깨끗지 못하고 더럽다면 성경에 기록된 그 많은 율법과 율례 그리고 규례들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말씀으로 자신의 양심을 개발시키고 또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도덕적 높은 표준을 향하여 가는 일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모두는 사랑이라고 말 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가페적인 것이며, 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아주 적극적이고 무아적인 높은 사랑이다.
그분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계속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나중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특별히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이러한 사랑에 관한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쩌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게 될 수도 있는 전쟁행위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세계2차대전 당시를 실례로 들어보면독일과 영국이 서로 원수의 나라가 되어 전쟁을 하는데 독일의 그리스도인이
영국인의 그리스도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군사훈련 및 폭력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등에 가담하는 것 모두를 배제해야 한다.
군사훈련이란 전쟁에 나가 사람들을 죽이는 훈련이며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군사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연습을 한다고 생각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던 하지 않던 간에 실제로는 그 훈련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훈련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군대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경말씀은 그런 사고를 용납하지 않는다.
어느 국가든 자기 나라의 군대가 공격하고 정복하기 위한 군대라고 말하는 나라는 지상에 없다.
그런데 왜 이 지구상에는 이토록 전쟁이 끊이지 않는가?
군대는 꼭 정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도 군대는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을 권리가 없다. 십계명 중에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이 있다.
이것은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생명을 취해가실 권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 위한 무기를 손에 잡고 훈련에 참여하는 일과
전쟁 무기를 개발하거나 취급하는 것과 같은 일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없다.
성경 가운데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점을 인용하여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 전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한 성전이었다는 것이었다.
과연 오늘날의 전쟁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성전(聖戰)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의 시대 이후에는 사람으로 구성된 군대를 사용하지 않으심을 명백히 밝혀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 무장한 폭도들이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협하고 그분을 붙잡고자 하였을 때
제자였던 베드로가 칼을 꺼내어 폭도 중의 한 사람을 쳤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베드로의 폭력이 방어였으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필요하다면 천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사용하실 수 있을지라도 사람들로 구성된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그리스도인들과 그 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이나 무기를 잡는 일을 거부해 온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에드워드 기본'著 [그리스도교 역사] (뉴욕 1891년판) 162,163쪽.-“서기 295년 로마제국에서 살던 막시밀리아누스는 ‘남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과 예수의 가르침대로 남을 죽이는 군인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제국의 칼에 죽는 길을 택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해 순교를 택했다.
물론 나중에 기독교는 국교가 되면서 국가와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제국의 민간행정이나 국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그리스도인들이 군인이나 지방장관이나
방백이 되는 것은 그들의 거룩한 의무를 배신한 것이 되므로,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였다.”
구글리엘모 페레로, 코라도 바르바갈로. 共著 [로마 소사](뉴욕 1919년판),382쪽- “군대의 경우는 민간 행정보다 더 심했다.
제 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칼을 잡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하였고, 소송을 해도 안 되는 평화의 사람들이
전투에 참여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였고, 군복무와 그리스도교는 합치될 수 없음을 시인하였다”
어네스트 윌리엄 반스,著 [그리스도교의 흥기] (런던 1947년판) 333쪽-“현존하는 모든 자료를 세밀히 검토하여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마커스 아우렐리우스'황제시까지는 한사람도 군인이 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이 된 군인으로서 군복무를 계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A.고르돈 내스비'編 [그리스도인 세계의 보물] (뉴욕 1953년판) 369쪽- “이 신도들은 군복무나 전쟁 참여를 거부하였다....
'오리겐'은....'그리스도인 교회는 어떠한 나라와도 전쟁 할 수 없다. 그들의 지도자는 그들이 평화의 자녀라고 설파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당시 군복무를 거절한 이유로 순교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로마'의 유명한 퇴역장군의 아들인 '막시밀리안'은 295년 3월 12일 '로마'군의 징집령에 불응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하고 간단히 말하였다.”
제시 이 렌치(미주리 대학교 역사학 교수)著 [문명의 행진, 고대와 중세사] (뉴욕 1931년판) 205쪽-
“참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향을 피워 충성을 표시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화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로마 군대복무를 거부하였다”
유진 A 콜리간, 막스웰 F. 리트윈. 共著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뉴욕 1932년판) 88,89쪽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였다.....
그들은 평화를 믿었기 때문에 로마제국군대에 복무하기를 거부하였다.”
알렉산더 로버츠, 제임스 도널드슨. 共編 [니케아 공의회 이전 교부들] 3권 99, 100쪽 - “군사적 영예의 진정한 근원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전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한 것인가 여부 부터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고 선언하셨는데, 칼을 잡는 것이 적법할 것인가?
평화의 아들이 소송을 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데 하물며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취한 길은 군복무를 즉각 포기하는 것이었다.…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은 그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대사전>(대한 기독교서회, 발행 : 1972년 11월 15일) ‘전쟁과 평화’ 제하 911쪽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교훈에 따라 원수를 사랑했고
살인행위를 극력 죄악시하면서 병역을 거부했다. 그것이 역사적 평화주의의 시초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된 이래 십자가는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라기보다도
군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의 타락을 지적한 점에 유의하라)
기독교문사 발행 <기독교대백과사전> 초판, 5권 944쪽, ‘막시밀리안’ 제하.- “295년 사망. 혹은 마르밀리안이라고도 불린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누미디아의 테베스테에서 로마군인으로 사역하기를 거절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국문판) 15권 ‘양심적 병역 거부자’ 제하.-
“양심적 병역거부는 그리스도교 시대 초기부터 존재해왔고,…”
<서양사개론> (2판, 민석홍 저, 삼영사 발행), 139쪽 - “‘그리스도교의 성장과 박해’- “로마는 처음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으나
그 교세가 확대됨에 따라 교인들이 황제예배를 거부하고, 병역거부의 태도를 보이므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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