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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 와그너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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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에 관하여 말씀하려고 하는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다만 "모든 믿는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뜻의 사본이다. 모든 불의는 다 죄이며 불법이지만, 복음은 그 죄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치료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과 조화를 이루도록 역사하며 그들의 생애에서 의로운 율법이 나타나도록 해준다.
이 역사는 모두 다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면서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치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v
이 말씀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어느 시대에나 항상 같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직접 만날때까지 변함이 없을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선지자 하박국이 한 말씀을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다(합 2:4).
만일 구약의 선지자들이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면 그때에는 구약 성경 밖에 없었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먼 태고시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에 대하여 불완전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때에는 의인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바울은 태초로 돌아가서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예를 들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 또 노아에 대해서도 그가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
그의 집을 구원하고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말했다(히 11:7).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었으며, 그리고 예수의 이름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행 4:12).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난 날의 생애의 죄에 대하여 용서받을 필요를 깨달았을 때에, 행사했던 믿음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경주가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은 첫째로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들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을 나타내는 행위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런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집회에서 입버릇처럼 늘 하는 말이 있다면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면서 처음 믿었을 때에 있었던
과거의 체험이나 기쁨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현재 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기쁨이나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들에게는 다른 나라의 방언을 듣고 있는 느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의 문제를 분명하게 영광의 나라와 연결시키면서 믿음과 같은 아주 힘있는 실례를 들어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5,6).
에녹이 믿음으로 옮기워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말씀에 유의하여야 한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옮기어졌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것으로 에녹이 믿음으로 옮기어졌다는 문제가 충분히 입증된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하나도 할 수 없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선한 행위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전혀 이를 수가 없다.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의 죄짐을 가져가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좋았을지라도,
그 믿음이 그의 은혜의 시간이 마치기까지 계속 증가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가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고 실패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실망이 되어 자포자기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그들이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계속 실패하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아무리 용감한 군인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싸움터에 나가서 계속 싸움에 지기만 한다면 낙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한탄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불쌍한 영혼들이 자신을 참으로 신뢰하지 않고, 저희 자신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분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롬 5:11).
사도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비록 시험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에라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뢰와 패배의 가련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최후에 받을 행복에 대한 모든 약속은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1:7). 이기는 자는 승리를 얻은 자이다.
유업을 얻는 것은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고 승리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승리는 지금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얻어야 할 승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승리이며, 우리 자신과 자기 방종에 대한 승리이다.
이러한 원수와 싸워서 이길 때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아무도 그가 기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원수가 굴복하는 것을 볼 때 기쁨이 마음에서 저절로 솟아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적인 자아와의 싸움과 세상적인 욕망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두려움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까지 승리의 기쁨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실패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승리할 때에 계속 싸운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백전 노장은 싸움터에 나가기를 원한다.
알렉산더의 군사들은 그의 지휘 아래서는 패배를 몰랐었기 때문에 항상 앞장서서 싸움터로 나아갔었다고 한다.
승리할 때마다 의기 충천하여 힘이 더욱 생겼고 이와는 반대로 패배한 적은 의기소침하여 힘이 더욱 없어졌었다.
그러면 영적인 싸움에서는 어떻게 하면 계속 승리할 수 있을까? 사랑의 제자 요한의 말을 들어 보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다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여기에 능력의 비결이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그가 우리의 마음에 계시면서 그의 일을 하신다면, 계속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자랑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라고 말했고(시 32:2),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했다(갈 6:14).
알렉산더의 군대는 백전백승의 군대로 생각되었다. 왜 그러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원래부터 그들의 모든 적들보다 더 강하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이 알렉산더의 지휘를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힘은 알렉산더의 지도력에 있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지도하에 있었다면 자주 패배했었을 것이다. 유니온 군대가 윈체스터에 있는 적 앞에서
벌벌 떨면서 패주하고 있을 때에 쉐라톤 장군이 나타나서 그들의 패주를 승리로 이끌었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그 병사들은 우왕좌왕 하는 폭도들에 불과하였을 것이지만 쉐라톤 장군이 진두 지휘하면서부터는 무적의 군대가 되었다.
전쟁 후에 그러한 장군의 지휘하에서 싸웠던 병사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입이 마르도록 그들의 장군을 찬양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강했고 그 장군과 같은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대장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모든 원수의 두목을 만나서 한 손으로 정복해 버리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싸움터에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겨야 할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신뢰할 것이며 그후부터는 계속 승리를 하면서 그들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하신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할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믿음을 통하여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팔을 붙들면, 그의 크신 능력이 그 일을 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안에 어떻게 역사하고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이룬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가를 말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이다.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8)
성령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욕심을 극복하고 자만심과 시기심과 이기심에 대하여 승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성령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로서는 이미 이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베드로가 주위에서 파도가 치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하여 물위로 걸어갈 수 있었던가를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물위로 걸어갔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가 눈을 계속 주님에게 고정하고 있는 동안은 발밑에 견고한 바위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걸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자만심을 가지고 물위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자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믿음은 그가 물위로 걸어가는 것을 가능케 만들었지만 두려움은 그를 물속으로 가라앉히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 11:30)
왜 이 말씀을 기록하였는가?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우리가 무장한 군인들과 싸우고 견고한 성을 빼앗도록 부름을 받게 될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니라."(엡 6:12)
그러나 볼 수 있는 육신의 원수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은 승리를 기록한 것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의 싸움에서 믿음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육적인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싸움에서도 강력한 능력이 된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옛날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육적인 원수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웁고 용기를 주는 것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라는 말씀이다(히 11:33,34).
그들의 약함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 그들에게 능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할 것인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영문시조 1889년 3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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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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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롬 14:23), 죄는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1898년 10월 18일 리뷰 앤드 헤랄드지의 첫 페이지에서 예언의 신이 말한 바와 같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을 얻는 것보다도 휠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 근거하여 이번호부터 리뷰지의 본란에 믿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계속 기고하여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 믿음이 오며 믿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등의
"다른 어떤 지식을 얻는 것보다도 휠씬 더 중요한" 이 지식을 얻도록 하려고 한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8년 11월 29일)
성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지식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길러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해 보았자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주님이 믿음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들은 믿음의 정의가 무엇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실제가 무엇이며 그 정의에 들어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알거나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때문에 지금 믿음의 정의를 다루는 것보다는 오히려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보면서 그 실제 자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믿음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느날 어떤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6-10)
여기에 예수님께서 믿음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임을 발견할 때에 믿음이 무엇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데 그가 백부장이 나타낸 것을 믿음, 곧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백부장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가 주님께서 그 일을 해 주시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백부장은 그것을 막으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제 백부장은 무엇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는가?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의 하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직 무엇에만 의존했는가? "다만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형제 자매들이여 믿음이란 무엇인가?
(리뷰 앤드 헤랄드 1898년 12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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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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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며 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마음 속에 넣어 주기 위하여 말씀 그 자체 안에 그 말씀이 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미쁘신 말씀" 곧 믿음으로 충만한 말씀인 것이다.
성경의 맨 처음 장의 대부분이 믿음 안에서 가르치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믿음을 분명하게 깨우쳐 넣어주는 여섯 구절의 분명한 말씀이 있으며 여기에 첫절을 이 여섯 구절들을 근본적으로 연결시키는 말씀으로 보면 일곱 구절의 말씀이 있다.
믿음을 넣어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룬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성경의 맨 처음 절부터 읽어보도록 하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시 33:6-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없었지만 말씀하시니 "이루었다". 단지 말씀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했는가? 오직 말씀이 그것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흑암이 모든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빛이 있기를 원하셨다. 모든 것이 완전히 흑암이었을 때에 어떻게 하여 빛이 있을 수 있게 하셨는가?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빛을 창조하셨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빛이)비취"었다.
(시 119:130)
첫째로 궁창, 곧 공중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궁창이 있기를 원하셨다. 어떻게 궁창이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궁창이 있어…그대로 되니라" "그대로 되니라"는 말의 다른 번역은 "이렇게 되었느니라"이다.
무엇이 궁창을 있게 하였는가? 무엇이 궁창을 이렇게 있도록 만들었는가? 오직 말씀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말씀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체가 이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에 하나님께서 뭍이 있기를 원하셨다. 이 뭍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다음에 채소와 과목이 있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 (그대로 되니라)."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뭍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 (그대로 되니라).
이와같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말씀만 하였으며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하신 말씀 자체가 만물을 창조하였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구속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오로지 말씀으로 병자를 치료하셨고 마귀를 쫓아 내셨고 태풍을 잔잔케 하셨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이 모든 일에서도 역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언제나 창조주이시며 언제나 말씀으로만 모든 일을 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말씀으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신 일을 스스로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 근거하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말씀 그 자체가 그 말씀한 일을 이룰 것을 기대하는 것이며, 말씀이 그 말씀한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믿음을 가르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 이러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며, 사람들에게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며,
사람들에게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가르치려면 하나님의 말씀 스스로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그 말씀만 의존하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며, 또 믿음을 기르는 것은 말씀이 그 말씀한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그 말씀 자체만을 의존하는 마음이점점 커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보다 휠씬 더 중요하다."
여러분은 믿음을 기르고 있는가? (리뷰 앤드 헤랄드 1898년 1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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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스스로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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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그 말씀한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들어 있으므로 그 말씀에서 말씀하는 일의 실상을 창조할 수 있으며 믿음은 말씀 자체가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으므로 만일 창조의 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볼수 없는 것들을 창조하여
존재하도록 하고 볼 수 있도록 하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일을 하도록 기대하고 그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다만 "말씀 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히 11:3)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으며 그러므로 그 말씀하신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결코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는다.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지금 보이는 것들이나 그러한 것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말씀하셨을 때에 그 말씀 자체가 세계를 존재하게 하였으므로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사이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말을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말에는 말한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만일 그가 말한 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것위에 다른 어떤 일을 부가적으로 해야 하며 그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하신 일이 실재로 존재한다. 단순히 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을 성취시킨다.
주님은 사람과 같이 하신 말씀 외에 다른 어떤 일을 행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씀에 어떤 능력을 더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그는 "말씀"만을 하실 뿐이며 그러면 그 일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곧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행사하는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단순히 거짓말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직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하신 말씀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다만 말씀만 하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사람은 말을 할 수는 있으나 실제는 그 말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같이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에는 그 말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렇게 된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이 미래에 다가올 수백년 간의 예언과 같이 어떤 때에 해당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그때가 실제로 이르러 오면 그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때에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말씀 외에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때를 위하여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며
그 말씀 속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때에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돌들이 즉시 소리쳤을 것을 보여주며
또 이것은 사흘이 되던 날에 그를 더 이상 사망에 붙들어 두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다. 그 안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으며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러한 말씀으로 신뢰하고 의존한다면 그것이 곧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리뷰 앤드 헤랄드 1898년 1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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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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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지식보다 휠씬 더 중요하다."
이 지식은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할 어떤 필요성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 않고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아주 많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처음 신앙할 때에 모든 사람이 믿음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 남아있는 문제는 오직 믿음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미 받은 믿음을 기르지 않고서는 그 받은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을 기를 때에 믿음만큼 빨리 자라는 것이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이 더욱 자라고"라고 말씀한다(살후1: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그 말씀하는 것을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을 기르는 것이 곧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이 선물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이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도록 시키는 자본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 자본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장사하고 기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이 자본은 이용할 때에 감소할 위험은 절대로 없다. 이것은 사용하는 만큼 늘어날 뿐이며 굉장히 잘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는 만큼 분명히 주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이 주어지며 영혼의 완전한 구원을 보장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10:9).
이와같이 믿음 곧 믿음의 말씀이 바로 모든 사람의 입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일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 그들은 완전히 사단을 믿었다.
사단에게 완전히 굴복하여 사단의 완전한 포로가 되었다. 그후 그들과 사단 간에는 완전한 연합과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고 이 연합을 부수고 이 평화를 깨뜨렸다.
그는 그의 말씀으로 이 일을 하시고 사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게 되게 하리니"(창 3:15).
하나님만이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 사이에 혐오감을 넣어줄 수 있다.
인간은 타락 후에 그 본성이 악하게 되었고 그후 사단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있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연합을 형성하였을 것이며 그들 간의 싸움 대신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계속 싸움만을 하였을 것이다.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본래부터 적의가 없었다. 둘다 악하며 배도를 통해서 악하게 되었다.
악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항상 악이 선을 대적하며 연합을 이룬다.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한 인간은 친교를 맺는다. 타락한 천사들의 간교한 대장은 만일 악한 천사들처럼 인간을 끌어 들여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동맹하여 하늘에 반역하도록 인간을 끌어 들이는 그의 대리자들로 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사단을 혐오하는 능력이 없어진다.
지상에서 인간과 사단 간의 혐오감은 초자연적으로 넣어진다. 하나님의 개심시키는 능력이 날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역사하지 않는다면 신앙으로 키우는 마음이 없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보다 사단의 포로가 되기를 선택할 것이다. 하나님이 혐오감을 넣어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때에만 그 혐오감이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완전히 돌이키도록 하여 주의 편에 서게 한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각 사람의 마음 속에 넣어주는 사단에 대한 혐오감과 악에 대한 증오심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갈망하게 하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롬 7:14-25).
이와같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사단에 대한 적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구원을 요구하는 악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신 믿음의 선물이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이며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입과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말씀"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겠는가 하고 말하지 말며
누가 음부에 내려가거나 멀리 가서 믿음을 찾아 우리에게 가져다 주겠는가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신 30:11-14; 롬 10:6-8)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다른 모든 세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행사하자.
"믿음을 행사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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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의를 창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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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기를 기대함으로 의롭게 되는 의를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에 의하여 얻는 의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하는 능력이 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오직 말씀으로 성난 바다를 잔잔케 하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죄를 용서하셨다. 여기에서도 역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도다"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태초에 창조하실 때에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으며
땅에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신 이 같으신 분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의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롬 3:25)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워 만물을 존재하도록 하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만을 하시면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재창조가 되는 구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워 의의 말씀을 하시도록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의 말씀은 창조하실 때에 하신 말씀이나 구속하실 때에 하시는 말씀이 다같은 말씀이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전에 모든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는 지금 모든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가 전혀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모든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를 창조할 말씀을 하시도록 하셨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도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모든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씀하신 후에 모든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말씀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을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애도 이와 똑같다. 인간의 생애에는 의가 없다. 인간은 그의 생애에 나타날 수 있는 의가 그에게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캄캄한 흑암같은 인간의 생애에 의가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의가 있게 되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의나 또는 의를 창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에게 없었지만 말씀을 받은 후에는 완전한 의와 그 의를 샘솟게 하는 원천이 바로 그에게 있게 되었다.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태초에 창조할 당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똑같이
그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도록 기대하고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의존할 때에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인간과 그의 생애에 의를 창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
말씀 자체가 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의롭게 되었음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렇다. 주님을 찬양하라.
그러므로 이 복된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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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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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을 얻는 것보다 휠씬 더 중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기대하는 것이며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믿음, 곧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무엇을 행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믿음의 일에 있어서 우리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은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80살이 넘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으나 아이가 없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5:5).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 말씀하신 일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사라는 그의 기대를 하나님의 말씀에만 두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창 16:2) 그순간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에서 벗어져 나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끝까지 바라고 의존하는 대신 "사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아이가 태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사라에게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서 생긴 일을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거절하시고 한 아이가 태어난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여 버리셨다.
그런 후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도록 할 것이며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후손과 언약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계속 말씀하셨다. 또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셨다.
왜냐하면 사래도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태어난 그 아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알고
이 문제에 주님의 관심을 끌려고 하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영케 할찌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창 17:15-21)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오직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라는 그의 계략은 단지 불화와 고통만을 가져오고 약속의 성취를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잡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이제 그 모든 계략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살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쨌든 이것은 말씀의 성취가 어느 때보다도
더 요원한 것같이 보였으나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고 보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는 것외에는 다른 무엇을 의존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완전히 그 말씀에 매달렸었다.
그들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버리고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시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에 의지하고 오직 말씀에 매달리고 완전히 그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이제 오직 말씀만이 역사할 길이 밝히 열렸으므로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약속하신 "자손"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력하지만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 11:11)
"그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이와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 이것은 믿음을 가르친 성경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기르는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의미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니라."(갈 3:9)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거부하고 인간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가운데서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자들은
모두 믿음에 속한 자들이며 믿음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 복을 받을 자들이다.
오,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아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다.
누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모든 힘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겠는가!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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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만을 신뢰한 아브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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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던 모든 불신의 계획을 완전히 청산하고
오직 믿음 위에 서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했을 때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노선과 참된 믿음에서 벗어났었지만 이제 오직 말씀과 참된 믿음으로 돌아왔었기 때문에
하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실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신뢰하여 이스마엘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아이 이삭을 얻었다.
그러나 아제 이삭을 얻었으나 이삭까지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만을 신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받았다. 이삭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자손이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 하나님은 그 말씀을 확증하시면서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21:12).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창 26:4)
그러나 만일 이삭을 번제로 드려 불사른다면 그를 통해서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이 어떻게 될 것인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라는 약속이 어떻게 될것인가?
그렇지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스마엘을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삭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면서 이삭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고 칭하리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가 아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알았을 때에 그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따랐으며 이런 말씀의 조화나 설명이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전에 내가 하나님의 약속에 간여하여 방해가 되었지만내가 행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만 돌아갔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주셨다.
그런데 이제 약속의 자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
하나님이 처음에 기적으로 이삭을 주셨으므로 기적으로 그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번제로 바칠 때에 그는 죽을 것이다.
그때에 그를 다시 돌려 주실 수 있는 기적은 오직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하실 수 있으시므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삭을 다시 살리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하신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나의 몸과 사라의 몸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삭을 낳을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시므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제 그의 마음은 정하였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갔다.
사흘째 되던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4,5) 누가 갈 것인가?
"내가 아이와 함께 … 가서" 그러면 누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 "내가 아이와 함게… 가서…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간 것처럼 꼭 그와 함께 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이삭이 잿더미에서 살아나 함께 돌아갈 것을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자손이라 칭하리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저 했다.(히 11:17-19)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약 2:23). 그러나 더 나아가서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다.(롬 4:23-25)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 주는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이다.
그리고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깨닫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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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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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것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먼저 자신이 경건치 아니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음에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그는 바로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건치 않다. "경건치 아니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 선하심, 품성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롬 3:24)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건치 않다고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있지 않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9-18)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경건한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을 의롭다 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온전히 값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의와 구원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우리 개개인을 의롭다 해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말같이 들릴른지는 모르겠지만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한 유일한 자격과 준비는 각 사람이 경건치 아니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에 이런 자격을 갖추고 준비를 하였으므로 의롭다 함을 완전히 값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얻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은 오로지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경건치 않다는 것을 믿고 시인하는 것까지는 매우 쉬운 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신 것을 믿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 하신 것을 믿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경건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 안에서 어떤 선함을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고 또 자신을 고쳐서 올바르게 될 수 있다면 (선을 찾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기를 바랄 용기를 좀 가질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될려고 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버릴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 안에서 선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미 선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곳에서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대단히 경건치 못하므로 주님이 어떻게 나를 의롭게 해줄 수 있는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말에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경건하다면 나는 의롭기 때문에 의롭게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경건과 불경건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대단히 경건치 못하여
의롭다 함을 발견할 어떤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에 바로 거기에서 믿음이 생긴다.
정말로 믿음이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은 오직 그곳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존하거나 또는 자신을 의존할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는 한 믿음이 있을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다만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의지할 만한 모든 근거가 없어지고 또 없어진 것을 인정할 때에 눈에 보이는 모든 일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을 때에,
바로 그때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면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 곧 말씀에 자신을 맡길 때에 믿음이 들어온다.
그러므로 비록 완전히 경건치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온전히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말씀들은 영원한 진리일 뿐이다.
(롬 4:5; 3:22,25)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가?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깨닫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2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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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외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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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믿음은 말씀에서 말씀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단순히 말씀만을 의존하여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은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존하므로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죄많고 경건치 않은 죄인들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 밖에 없는데 그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는 범죄를 하여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세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다.
7년 기근이나 다윗이 그의 대적에게 쫓겨 석달을 도망다니거나 또는 3일 동안의 온역의 셋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택하려 하지 않고 모두 여호와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맡기면서 "여호와께서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삼하 24:14)
우리가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와같이 하면 정말로 의를 얻으며 그리고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기 때문이다(사 32:17).
우리가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여 의를 얻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하나님과 인간)로 하나를 만드사…원수된 것…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하나님과 인간)로 자기 안에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
더 나아가서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여 의를 얻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골 1:20-23).
다시 말하면 만일 너희가 오직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계속 의존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주 분명한 길과 완전한 칭의와 확실한 평강을 이루어 놓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만을 의지하여 이 모든 것을 받기만 하라고 요청하실 때에 왜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려고 하지 아니하는건가?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믿음을 행사하는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성경에서 뜻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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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말씀에서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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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말씀에서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다.
믿음이 곧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진리에서도 말해주고 있다(롬 10:17).
이와 같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이것은 다윗의 생애에 있었던 한 사건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다윗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려는 생각을 하였을 때에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그때에 다윗은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를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7:11-29)
다윗의 기도는 오로지 믿음의 기도였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기도의 원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기도의 기초였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기도를 항상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다윗의 소망 전부였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였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따라 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알았다.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알았다(요일 5:14).
그러므로 그는 그대로 하자고 말했다. 그러므로 역시 그 기도의 응답은 다윗에게 과거와 현재와 영원히 확실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록하여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기도를 하는 법을 알고 또 기도로 믿음을 기르는 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로 가서 이렇게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믿음을 기르는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성경이 뜻하는 바를 아는 지식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지식보다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2월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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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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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 믿음은 그 말씀에서 말하는 일을 이루도록 그 말씀만을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다.
이 모든 진리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누구나 믿음으로 구하기 위하여 먼저 그가 구하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구하려는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다윗과 같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오직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할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구하려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안다.
왜냐하면 그의 소망의 유일한 기초는 그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또 그의 기도의 유일한 기초는 곧 말씀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와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이와 같이 하여 우리의 믿음이 계속 견실하고 강하게 성장하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지만 그들이 기도하는 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받는지에 관해서 매우 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불확실하게 행동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을 주셔서 누구나 모든 선행을 하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시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것들을 구하고 그 분명한 말씀을 기초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따라 간구하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기도한 것을 받은 줄로 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모든 기도가 항상 확실하고 생애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선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믿음은 확실하고 강할 것이며 날마다 능력이 더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이 기도한 것처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한다.(눅 17:5)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도와 함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많아짐에 따라 우리 안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서 말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주님에게 기도하고 그 말씀을 완전히 믿으며 그것을 이미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그 말씀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안에서 살아있다.
이와같이 우리는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유 1:20)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방법이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행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깨닫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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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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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누가 의인인가? 그들은 오직 믿음에 속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에 속한 자들 오직 이런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서 의인이다.
그런데 믿음은 말씀에서 말하는 것을 그 말씀이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다.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이 … 나의 뜻을 이루며"(사 55:1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존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자들이다.
이것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이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므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사람은 그가 의롭게 되는 것과 똑같이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된 후에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믿음으로 사는 것 곧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 외에는 정말로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만물은 다만 죽음뿐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물의 시작이요, 생명이다. 왜냐하면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 곧 해와 달과 별과 동물과 인간들 모두가 존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의존되고 있다.
하나님이 오직 인간에게만 죽고 사는 문제를 선택하도록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이 선물은 믿음의 문을 연다. 사람이 유일한 생명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를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존하는 믿음이 그가 생명의 수단을 붙드는 방법이 된다.
이와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는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과학을 행사하기까지는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가질 수 없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에 순종할 수 없다""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저희는 …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3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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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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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 1:17).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의지하여 그 말씀에서 말하는 일을 그 말씀이 이루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이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사람들이 그 말씀을 완전히 믿을 수 있을만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의가 있는가? 그렇다.
그 의가 바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목적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었다. (롬 3: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나타내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으므로 우리가 그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고 말씀에서 말하는 바를
말씀이 이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어디에서 말씀하셨는가? 이 말씀은 "용서"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용서)하시며"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이다.(요일 1:9; 시 103:4)
그러면 "용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용서"라는 말의 뜻은 "대신 준다"는 말이다.
주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단순히 대신 준다는 의미이다.
주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죄를 대신하여 무엇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 죄대신에 무엇을 주시는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를 주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에 죄 대신에 의를 주신다.
그런데 주께서 가지고 계신 유일한 의는 그분 자신의 의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대신에 주시고 또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하나님의 의는 선물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으므로 깨끗하게 될려면 완전히 값없이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죄의 용서 - 죄 대신에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거저 주시는 것이므로 이 하나님의 의는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롬 5:18)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은 바로 죄 대신에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은 오로지 용서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용서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믿음은 말씀에서 말하는 바를 이루도록 완전히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의는 전혀 믿음에 속한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 7:8)
우리가 주님에게 여러번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대신에 무엇을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에게 죄 대신에 주시기를 구할 때에 그것은 바로 죄 대신에 주시고 또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
곧 의를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구할 때에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주님께서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는 우리를 용서하신다.
"저는 미쁘시고" 다시 말하면 그는 틀림없으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
주님이 죄를 대신하여 주시는 유일한 것은 그분의 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때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거저 주시는 의에 대하여 왜 그에게 감사하지 않겠는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만큼 간단하고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정말로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에 우리의 죄 대신에 의를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의를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하게 받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불신 속에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저희는 …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3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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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하는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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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
이 성경 말씀이 원래 쓰여졌을 때 그들의 마음에 품은 것은 할례가 전부였다.
단순히 할례가 의미하는 것때문에 그들에게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할례가 의미하는 것은 행위 오직 행위였었다.
할례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으므로 창조보다 더 컸던 것이다.
왜냐하면 랍비들이 말한 바와같이 "매우 위대한 것은 할례이므로 만일 할례가 없다면 거룩하시고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계명만큼 위대하고 율법의 모든 계명과 동등하다."(바울의 생애 파라 저 22:5; 35:4)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토록 위대했던 이것을 주님은 "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바람에 휩쓸려 가는 먼지보듯 생각하셨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할례를 신봉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것은 단순히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행위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견지에서 그들의 행위가 없는 것을 자랑하고 죄를 변명하려고 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무할례가 효력이 없되"라는 말씀이 똑같은 효력이 있다(갈 6:15; 5:6).
이와 관련하여 볼 때에 이것은 단순히 행위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행위가 없는 것 즉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그러므로 행위가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행위의 있고 없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모든 공로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일찍이 행하고 행하지 않은
어떤 행위에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공로의 근거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배제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이다.
오늘날에도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 있건 또는 안에 있건 간에 행위가 있고 없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런 말씀이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자신들이 잘못하고 무력하고 정죄받은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문, 명성, 재산, 재능, 덕, 경건 및 당신 안에 혹은 당신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어떤 것도 당신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연합의 띠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증언 31번 44,45)
그러면 무엇이 소용있다는 말인가? 모든 사람이 완전히 버림을 받았다는 말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영원히 효력이 있도록 해 주신 주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고" 행위가 있고 없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라고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역사하는 믿음"이 소용있다는 것도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가 아니고 "역사하는(행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유의하자.
이것이 스스로 역사할 수 있고 또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것, 오직 이것만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리고 믿음이 역사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뿐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에 소용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당신 안에 어떤 선함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자하신 구세주의 자비로 돌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교회와의 관계나 형제들이 당신을 존경하는 태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분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완전히 신뢰하여야 한다."(상동 44,45)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자."
"저희는 …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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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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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 말씀은 얼마나 복된 약속인가!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된다.
육신의 욕심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는가! 그 육신의 명령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 법은 얼마나 탄압적인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노예생활은 얼마나 암담한 것인가!
모든 사람이 이런 삶을 경험했었다. 그들은 원하는 선을 행하기를 갈망하나 미워하는 죄악을 행할 뿐이었으며, 선을 행할 마음을 가지고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지만 그들의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마음의 법과 싸워 그들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오는 것을 보고 마침내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친다(롬 7:14-24).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에게 감사하자.
이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 하나님의 영 안에서 발견한다.(롬 7:25; 8:1,2)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으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날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가 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이 역사하는 것들을 한번 열거해 보자.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밖에 이와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할 때에 이러한 일을 하나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를 한다.
이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은 미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매우 바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은 가질만한 가치가 있지 않는가? 단지 구하고 받을 때에 이것은 구하고 받을만한 가치가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신 자유 안에서 서고 더 굳게 서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렇다.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행하라". (마 7:7,8; 요 20:22; 엡 5:18)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3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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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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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라는 말이다.(롬 5:1)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7,28).
복음은 자랑하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며 자랑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의도의 자연 발생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은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행위 - 선한 행위는 복음이 이루는 하나의 큰 목적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여기에는 모순이 조금도 없다. 다른 점은 우리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 사이에 있다.
우리의 행위는 항상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행위는 항상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주제넘는 생각이다.
다섯살 된 아이가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웃을 것이다.
하물며 보잘것 없는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선행은 하나의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고 행위이며 이 행위는 오직 살아있는 인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홀로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행위만이 가치가 있을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행위를 가진 사람만이 의롭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그 행위를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행위이다.
자기 만족에 빠진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대답하셨다.(요 6:28,29)
믿음은 역사한다. (갈 5:6;살전 1:3) 믿음은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시게 하기(엡 3:17)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며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있다. (골 2: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스도 안에 계시면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면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생애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빌 2:13)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 필요가 없다.
이루어진 사실로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인 자신에게까지도 항상 하나의 비밀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다.(골 3:3)
그리스도인 자신도 볼 수 없을만큼 감추어져 있다.
인간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며 복음의 비밀이다. (골 1:27)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미 예비해두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런 선한 행위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런 선한 일을 예비해 놓으셨는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믿지 않는 자들)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그러나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5,3)
그러므로 안식일, 곧 주일 중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표로 주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겔 20:12,20)
안식일 준수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와 조금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인준하는 표와 인이 되며,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표이다.
안식일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쉬는 것이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쉬는 표이다.
제칠일 외에 다른 날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안식하는 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날에만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제칠일의 안식이다.
주일 중 모든 날중에서 이날만이 쉬는 날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행위와 뗄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일 중 첫째 날을 포함하여 다른 엿새 동안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그 육일 동안에는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육일 동안에는 언제나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면 이렇게 할 것이다. (요 3:21)
그러므로 사람은 매일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여야 하나 제칠일만은 그 안식의 표가 될 수 있다.
이미 제시한 진리의 자명한 결론으로서 두가지 점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에서 쉬는 표로 제칠일을 지키지 않고 다른 날을 세우는 것은 사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표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의 방법으로 대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우월하며 인간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의 표가 된다.
다른 날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받으며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표로 주신 날 외에 다른 날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단순히 완전하고 충만한 믿음의 표현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실함과 하나님이 그들의 진실한 믿음을 받으시는 사실이 그들이 지키는 날이 인간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표라는 사실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경고를 들을 때에 재앙이 만연한 집에서 나온 것처럼 배도의 표를 버릴 것이다.
또 다른 점은 안식일이 믿음의 표이고 어떤 사람도 믿도록 강요받을 수 없는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결과로 자연히 생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강요하여 믿도록 할 수 없다.
강제로 하여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기어 믿는다고 말할 수 있고 믿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짓말 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21).
그러므로 안식일은 완전한 믿음의 표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의 표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율법의 일부로서 신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과 신뢰가 없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쉬는 날인
제칠일까지도 외적으로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바이블 엑호 1896년 8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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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는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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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는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 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6-9)
이 말씀을 특히 마지막 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일 그대로 받아들이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으로 구원에 필요한 어떤 무엇이 더 있지 않은가?
첫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마지막 두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성경절들을 말한다.
너무나 분명한 말씀이므로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닐 수 없으며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죄인이 의지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 한 예로서 빌립보의 간수의 경우를 들어보자.
바울과 실라가 무자비하게 매를 맞은 후에 이 간수가 그들을 맡아서 지키게 되었다.
그들은 등이 찢기고 발에는 쇠고랑을 찼었지만 밤중에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찬송을 드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은 뒤흔들리고 모든 감옥문이 다 열렸다.
만일 그가 지키고 있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을 친다 하더라도 그 간수가 두려워 떨었던 것은
발아래 땅이 흔들리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에 대한 공포나 무서운 로마의 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지진을 바울이 전파한 큰 심판의 예고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말했다. 바울이 그에게 한 대답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 사람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심정에 눌려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만족스럽게 했던 바울의 대답은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간수의 찢어질 것같이 우러나오는 호소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을 했다. (행 16:31)
이 말씀은 우리가 바울의 로마서에서 인용한 말씀과 너무나 일치한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대답에 유의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이 말씀을 금으로 써서 모든 심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앞에 두고 계속 보도록 했으면 좋겠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것이다. 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믿음으로 다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믿음은 행위를 이루기 때문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담고 있으므로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대개 믿음에 대해서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이며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므로 능동적인 행위가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능동적인 것으로서 가장 실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현실적인 기초인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사 51:67)이며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만 (마 6:33), 믿음이 없이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심판대에 설 유일한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때문이다. (빌 3:9)
로마서 3장의 귀절에서 바울이 한 말씀을 읽어 보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보좌만큼 견고하고 변함이 없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서 무슨 악한 말을 하고 유린하며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은 영원토록 동일할 뿐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불순종하여 그들의 마음에 율법의 효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같이 민수기 30장 15절에서 "지키지 않은 서원은 폐하여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 믿음과 불순종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아무리 범법자가 믿음을 공언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범법자라는 사실은 그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소유는 마음에 율법을 굳게 세워서 하나님에게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사도 야곱은 믿음 하나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잠깐 동안 말씀을 보도록 하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직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죽은 율법주의로 바꾸어왔다.
그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기록한 말씀과 거의 하나같이 일치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행위가 없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죽은 것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을 가졌다면 행위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며
그렇게 된다고 해서 믿음이나 행위을 자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랑을 배제하기 때문이다.(롬 3:27)
자랑은 오직 죽은 행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믿음의 공언을 허울좋은 흉내로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야고보 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그의 악한 행위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단순히 믿음이 거짓 공언하는 자들에게 어떤 행위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야 하는가?
바울은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나 행위로서 말하고 있다.(딛 1:16)
야고보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성령의 열매인 선한 행실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크게 공언하기는 하나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바이블 엑호 1890년 8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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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율법의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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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잘 4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를 보기 전에 무슨 의미가 아닌가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같다. 그 이유는,
1. 그리스도께서 직접 율법에 관해서 "내가 …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마 5:17)
2. 선지자는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시기는 커녕 "그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다고 말했다. (사 42:21)
3. 율법이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4. 율법은 하나님의 의이며 하나님의 통치의 기초이므로 결코 폐지될 수 없다. (눅 16:17)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침"이라는 말은 반드시 "끝"을 의미하는 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의도, 목적, 취지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디모데 전서 1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경계의 목적(계명의 마침)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랑"이라고 번역한 말은 성경에서 자주 나오며 새 번역 성경에서도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요한 일서 5장 3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바울 자신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한다.(롬 13:10)
이 두 구절에서 디모데 전서 1장 5절에 나타난 같은 말(아가페)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계명의 목적은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하나의 자명한 사실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바울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구절의 다음 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율법에 관해서 말한 모세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청년에게 "네가 영생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마 19:17)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의로운 품성을 창조하고 또 순종하는 자는 살리라는 약속이 있으므로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바울의 말은 이 사상과 일치가 된다.(롬 7:10)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또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완전한 품성을 이루고 생명을 주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인간은 일단 율법을 범했으므로 그후의 순종은 결코 그의 품성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에 이르게 할 율법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롬 9:10)
만일 우리가 율법이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이 시점에서 중지한다면 모든 세상을 정죄와 사형 선고 아래에 버려두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의와 생명을 모두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씀이 있다.(롬 3:24; 5:1)
이 이상으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고 한결같이 율법을 순종하게 되기를 원했었던 의의 사람이다.
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1-4)
율법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왜 그러는가?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연약함이 조금도 없다. 연약함은 육신에 있는 것이다.
썩은 나무로 튼튼한 기둥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좋은 연장의 잘못이 아니다.
율법은 인간의 과거의 죄를 씻어서 죄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가엾은 타락한 인간은 그 육신에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의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입혀 주시고 그렇게 하여 "율법의 요구"가 그들의 생애에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와같이 하여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것이다.
결론으로 우리는 율법의 목적은 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몸소 사람의 성정을 쓰셨으므로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분 자신의 의를 나누어 주시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을 지킨 자들로서 설 때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분히 깨달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는 것을 거듭 말하는 바이다. (바이블 엑호 1892년 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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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할 수 없는 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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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난외 주석에서 "이기지 못하더라"고 번역한 것은 우리에게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며 믿는 자들에게 큰 위로의 기별을 전하여 준다.
이제 무슨 말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그리고 그분은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온 세상이 죄의 어두움 속에 있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에서 생겼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이방인들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져 있다.(엡 4:18)
이 세상의 흑암의 왕자 사단은 하나님의 참된 품성에 관하여 사람들을 속일려고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전 세계가 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잔인하고 변명 잘하고 성 잘내시는 분이라고 믿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빛을 세상에 전하도록 택하신 백성, 유대인들까지도 하나님을 떠났으며 이방인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방인의 어두움에 둘러 싸여 있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6)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었다.(고후 5:19)
하나님은 사단의 거짓을 논박하셨으나 큰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 가운데서 사시면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애를 보도록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과 그 능력이 사람들 안에서 나타나는 가능성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생애는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생애였었다.
사단은 자신의 모든 방법과 능력을 다 해 보았지만 그의 흠없는 생애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
그 빛은 항상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단이 그런 생애에 죄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무덤의 권세에 붙들어 둘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다. 스스로 그 생명을 버리셨다.
이와같은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버리셨을 때에 다시 생명을 취하시는 것을 사단이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말씀하셨다.(요10:17,1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같은 의미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이와같이 하여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히 7:16) 대제사장이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가 과시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 무한하고 흠없는 생명을 주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3)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세상의 빛이시며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신다.
그들의 빛은 그들 자신들로부터 나오지 않고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그들의 생명은 그들 자신들로부터 나오지 않고 그들의 죽을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고후 4:11 참조)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는 것이 무엇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빛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시편 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아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로다"라고 노래한다.(시 36:9)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계 22:1)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3,54)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잔치할 때에 이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덧붙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감의 말씀 속에 거하시며 또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얻는다.
이 생명은 위에서 읽은 대로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며 또 예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마시라"고 하셨다.(요 7:37)
이 생명은 그리스도인의 빛이며 또 이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 되게 한다.
이것은 그의 생명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축복과 위로가 되는 것은
아무리 큰 어두움을 통과해야 할지라도 어두움이 그 빛을 끌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생명의 빛은 그가 믿음을 행사하는 한 그의 것이며 어두움이 빛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자.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우둔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바이블 엑호 1892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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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위함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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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은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글 중의 하나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는 글이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모본이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유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 약속은 제한이 없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받는다.
이 축복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을만큼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롬 4:16).
특별히 17절의 하단은 주목할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비결이 들어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이 능력은 창조의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실 수 있다. 만일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아마 거짓말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면 그것은 분명히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것들이 생긴다.
우리는 신뢰에 대한 한 실례로 "엄마가 말하면 그렇지 않는 일도 그렇게 돼"라고 하는 어린 소녀의 말을 들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꼭 그렇다.
"태초"에라는 때를 말하기 전에는 땅은 전혀 아무것도 없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즉시 세상이 생겨났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이것이 로마서 4장 7절에서 보여주는 능력이다.
자, 계속 읽어 가면서 이와 관련하여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도록 하자.
사도 바울은 더욱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8-22)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여
그분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의가 없는 인간에게 의를 창조하실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련을 단순히 이삭의 출생과 관련하여 보고
거기서 끝나는 자들은 이 성경 기록의 모든 의미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이삭은 한낱 그의 씨라고 칭하는 자에 불과하지만 그 씨는 사실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갈 3:1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로 말미암아 모든 열국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셨다.(갈 3: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셨던 믿음이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능력을 보자.
그 자신의 몸은 이미 늙어 자녀를 생산할 수 없었고 사라도 같은 상태였었다.
이런 부부로부터 이삭이 출생한 것은 죽은 자로부터 생명을 취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자들을 신령한 생명으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였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인간적으로 볼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그의 믿음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만물을 창조하고 살리는 그분의 능력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제 이 모든 말씀의 목적을 보자.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와 같은 믿음이었으며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믿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같은 의를 우리도 받는다는 사실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은 물론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
참으로 이 모든 약속이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있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3,17,18)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맹세에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은 맹세로 확증을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더 개인적으로 적용하여 살펴보고 끝마치도록 하자.
죄로 떨고 있는 영혼들이여, 우리의 죄가 너무 많고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다.(고후 12:9)
그러므로 성경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히 11:34)
이 말은 하나님이 그들의 연약함을 취하여 그것을 강하게 만드신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크게 나타내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아브라함의 단순한 믿음을 가지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여 의에 이르렀는가?
그 자신의 몸이 죽은 것같음과 무능력함을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없는 것에서 창조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자신의 몸의 연약성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생각하며 우주를 창조하시 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말씀,
곧 이 말씀이 역시 우리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있는 자들이 되도록 만드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영문시조 1890년 10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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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무한한 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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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은 "육체로 거하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다.(골 2:9)
이 선물의 분량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주실 때에 만들어 주신 선물의 분량으로 보든지 또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신 선물의 분량으로 보든지 간에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그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은 오직 육체로 거하시는 신성의 충만한 분량이며 또 이것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분량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것은 무한한 은혜, 곧 그저 한량없는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의 분량에서 볼 때에도 이것은 마찬가지로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드린 것이며
이렇게 하여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데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은 역시 육체에 거하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다.
그러므로 역시 이런 견해에서 볼 때에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분량은 오직 신성의 충만한 분량이며
그것은 그저 무한량하다는 것을 주님의 분명한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다.
이 은혜는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며 주님에게 있는 모든 은혜이다. 이 은혜는 선하다.
그러나 이 은헤는 바로 주님이시며, 바로 주님과 같이 선한 일을 이룬다. 왜냐하면 주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한한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모두 주시고 값없이 주신다. 이 은혜는 우리의 것이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과 나의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선하다.
우리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주님은 매우 자비로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도록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이 충만한 은혜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충만한 은혜를 주셨다. 왜냐하면 은혜는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한다.(딛 2:11)
이와같이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은혜를 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
이 구절의 난외 주석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으며 또 이것은 그 본 구절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
모든 사람이 이 은혜를 받든지 또는 받지 않든지 간에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셨다는 진리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은혜를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거절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없으시다.
주님은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48)
주님께서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계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고
그분의 충만한 구원을 가져다 주시면서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분의 이같은 무한하신 은혜의 선물을 주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과 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7,12,13)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아주 충만하고 값없이 주신 은혜를 받으라.
주님께서 주신 분량대로 은혜를 받고 우리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분량대로 받지 말라.
우리 자신을 은혜에 복종하여 그 은혜를 주신 놀라운 뜻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이루도록 하라.
그러면 은혜가 그 뜻을 이룰 것이다. 은혜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되도록 만드실 것이며 은혜를 주신 분의 뜻과 소원을 성취하실 것이다.
"너희 자신을 …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리뷰 앤드 헤랄드 1894년 4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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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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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지배 아래서 죄를 짓는 것이 쉬운 것처럼
은혜의 지배 아래서 의를 행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은혜가 죄보다 능력이 없다면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로부터 받는 구원이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죄로부터 받는 구원은 분명히 죄보다 은혜에 더 많은 능력이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죄보다 은혜에 더 많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은혜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는
은혜없이 죄를 행하는 것이 쉬운만큼 의를 행하는 것이 쉬울 것은 극히 지당한 일이다.
아직까지 본성적으로 죄를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최대의 난 문제는 언제나 의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인간이 하나의 세력 곧 죄의 권세하에 예속되어 그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한, 인간이 알고 또 원하는 선을 행하기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죄의 세력보다 더 강한 세력이 지배하도록 하면 죄의 세력이 지배할 때에 그 세력의 뜻을 따르는 것이
쉬운 것처럼 더 강한 세력의 뜻을 따르는 것이 쉬우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단순히 은혜가 죄보다 능력이 더 많은 정도는 아니다.
사실 이것이 전부라 할지라도 그 정도에서라도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는 충만한 소망과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좋기는 하나 전부가 아니며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능력은 죄보다 은혜에 휠씬 더 많다. 왜냐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기 때문이다.(롬5:21)
그러므로 죄보다 은혜에 능력이 더 넘치는 것처럼 그만큼 더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소망과 위로가 넘치는 것이다.
그러면 죄보다 은혜에 능력이 얼마나 더 많은가? 잠깐동안 생각을 해보자.
스스로 한 두가지 질문을 해 보자. 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그러면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마귀로부터 온다. 죄는 마귀에게 속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은혜에는 죄보다 얼마나 더 많은 능력이 있는가?
이는 마귀보다 하나님이 더 능력있는 것처럼 죄보다 은혜에 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초보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이며 죄의 지배는 사단의 지배라는 것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의 능력으로 사단을 섬기는 것만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쉽다는 것은 잘 알 수가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데도 어려움이 생길 때에 아주 많은 사람이 사단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마 12:33)
가시 나무에서 포도를, 찔레에서 무화과를 결코 거둘 수는 없다.
먼저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좋고 새롭게 되어야 한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요 3:7; 갈 5:6)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지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으로, 또는 육신에 죄를 정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아 영생을 얻도록 하는 더욱 풍성한 은혜가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말자.
그렇게 되면 "새 생명" 가운데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며, 정말로 멍에가 쉽고 짐은 가벼움을 발견할 것이며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벧전 1:8)
예수께서도 의를 행하기가 어려우신 적이 있었던가? 누구나 즉시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될 수 있으셨는가?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
우리와 같은 혈육을 가지셨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지셨던 육신의 종류는 분명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았었다.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였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되셨었다.
이것은 하나를 빼놓은 모든 일이 아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분 스스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하셨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0)
그러면 왜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셨는데도 예수님은 항상 의를 행하는 것이 쉬우셨는가?
왜냐하면 자신을 결코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의지하셨다.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저 하셨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존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의를 행하기가 항상 쉬우셨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마찬가지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우리에게 본을 남기셨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천지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셨으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광스러운 권세를 따라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신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참여하셨으므로 만일 우리가 약속의 자녀이며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그분에게 주시고 또 그가 가지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고 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며 그리하여 그후부터는 더 이상 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의의 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더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과 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하는 바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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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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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자들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렇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누구나 충분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곧 은혜는 죄를 짓지 않게 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은혜가 없다면
그것은 은혜를 충만히 주시지 아니하기 때문이 아니고 주신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 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엡 4:7)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은 온전히 그 자신이며 그리고 그것은 "육체로 거하신 신성의 모든 충만"한 분량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의 유일한 분량이다.
무한정한 신성의 충만한 분량은 이 세상에 사는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유일한 은혜의 분량이다.
왜냐하면 "죄가 더한 곳에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하고
이제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은혜의 목적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표준에 온전히 이르고 완전하게 되는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성장의 분량에 비추어 온전하게 되기까지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또 죄가 많은 모든 사람에게 이 은혜를 주시고 이 은혜는 이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
이 은혜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구원의 분량은 오직 그 은혜 자체의 충만한 분량 곧 신성의 충만한 분량인 것이다.
각 사람에게 무한한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 자체의 충만한 정도까지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에게 무한한 구원이 없다면 그것은 왜 그러는가?
그것은 분명히 이미 주신 은혜를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각 사람에게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전에 죄가 지배한 것처럼
은혜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모든 죄의 권세를 물리치고 죄가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만일 죄가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지금까지 주관하고 있다면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그 잘못은 분명히 여기에 있다.
은혜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신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은혜를 헛되게 받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공언을 한다.
그러나 만일 신자들 생애에서 이 은혜가 죄 대신에 왕노릇하지 못하고 주관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다.
만일 은혜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온전한 사람을 이루도록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하나님의 은혜는 역사하도록 허용하기만 한다면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은혜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 은혜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은 그 능력으로 이루도록 주신 모든 것, 곧 영혼의 구원, 죄와 그 권세로부터의 구원, 생애에 의의 지배,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신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과 생애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능력이 역사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넉넉하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도록 주신 것이다. 그러나 불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죄에서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또 믿지마는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고 과거의 죄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은혜에 바쳤던 마음의 자리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다스리고 사단의 권세를 대항하도록 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다른 형태의 불신이다.
사실 그들의 생애에 그리스도의 형상의 완성이라는 은혜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에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고후 6:1-3)
여기에 "직책"이라는 말은 단순히 교회의 목사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봉사하는 직책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벧전 4:10)
그러므로 하나님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그 은혜와 복스러운 역사가 세상에 잘못 전해지지 않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그 은혜에 복종하는 데에 훼방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은혜를 헛되이 받을 때에
많은 일에 거리낌없이 있게 되고 은혜의 직책 자체가 훼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은혜에 마음의 자리를 허용할 때에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되고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가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자들의 생애에서 얼마나 완전하고 충만하게 지배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포함하여 다음의 일들을 말씀하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자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유의하여 읽어보기 바란다.
"모든 일에 …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4-10)
여기에 열거한 일은 이 세상에 사는 신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모든 일과 경험이다.
여기에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면 그 은혜가 그 사람의 생애를 점유하고 지배할 것이며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경험은 은혜로 받아들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정을 받도록 해주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충만하게 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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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있는 육신에 은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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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으므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매우 심각하고 곤란한 과오가 하나 있다.
이 과오는 개심하기 전에 있었던 죄있는 육신이 개심할 때에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다시 말하면 육신을 자신들로부터 완전히 제거함으로서 육신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이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고 개심하기 전과 똑같은 성질과 유혹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지닌 옛 사람의 육신이 여전히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준비가 없었으므로 실망하여 그들이 전혀 개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모두 잘못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 수 있다.
우리는 개심한 후에도 개심하기 전과 꼭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 몸은 개심한 후에도 개심하기 전과 꼭같은 재료인 같은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즉시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더 나아가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 육신도 역시 개심하기 전과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그 육신은 개심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간의 육신, 타고난 육신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에도 누구나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에도 역시 더욱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 육신이 전과 똑같은 육신이며 전과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인간의 육신이며
타고난 육신이라면 개심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 육신 역시 분명히 죄있는 육신이 아닌가?
바로 여기가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이 과오를 범하기 시작하는 곳이다.
이 마지막 질문에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오직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 육적인 몸으로 계속 머물러 있는 한 그렇다 라는 대답을 계속 단호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심한 사람의 육신이 여전히 죄있는 육신, 한낱 죄있는 육신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주장할 때에 그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므로 그 육신을 조금이라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육신이 아닌 것,
곧 하나님의 성령을 신뢰하고 그의 능력과 소망의 근원은 전혀 육신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줄곧 육신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완전히 불신하기 때문에 그 육신으로부터는 어떤 선한 일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신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충동이나 생각을 무자비하게 물리치고 박살을 낼 준비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조금도 실패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에서 승리로 힘에서 힘으로 전진하여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개심할 때에 우리의 옛 영이 새 육신으로 옷입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옛 육신 속에 새 영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옛 마음에 새 육신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옛 육신에 새 마음을 주는 것을 말한다.
구원과 승리는 인성을 없애버림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인성을 굴복시키고 지배하기 위하여 신의 성품을 받음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죄있는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에 있는 죄를 정복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죄없는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너희는 이 육신을 입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이니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한다.(빌 2:5)
성경은 너희는 오직 육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는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한다.(롬 12:2)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새롭게 함으로 승천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와 인성 곧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있는 육신과 똑같은 육신을 쓰시고
그 안에 있는 신의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의 능력으로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그러므로 거기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고(롬 7:25) 거기에는 우리의 승리가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육신의 죄됨을 보고 실망하지 말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의 빛과 그리스도의 마음의 분별력에 의해서만이 육신의 죄됨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육신의 죄됨을 많이 보면 볼수록 성령을 더욱 더 받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확실한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죄가 많음을 볼 때에 우리가 많은 죄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을 충만히 가진 것을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죄가 많은 곳에는
은혜가 더욱 넘치며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는
보증의 말씀을 알기 바란다.(롬 5:21)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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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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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고린도 후서 6장 1절에서 10절에 하신 말씀에서
아무것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생애에 직접 들어올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들어오며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것들을 받아서 신자들에게 유익하도록 바꾸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에 이바지 하도록 할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일 신자들이 주님께서 그들의 생애를 주관하시도록 허용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기를 허용하기만 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할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일을 너희를 위하여" 한다.(고후 4:15)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롬 8:28)
이것은 참으로 웅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것은 어떻게 신자들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후 2:14)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은 지금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전하도록 하여서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도록 하시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오직 우리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먼저 우리들에게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도록 하여 그들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 다음에 비로소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은 다함께 그 은혜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직분을 받았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모든 사람들은 다 그 화목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직책을 받는다. 여기에서도 이같은 권면을 할 수 있다.
"우리가 ...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우리는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는가?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라"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우리는 이 직분을 헛되이 받았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오직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도록 허용한다면
주께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처하도"록 하실 것이다.(고후 6:4) 이것은 사실이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같이 하여 주께서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이 일을 할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협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와같이 일하는 동역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같이 주님과 협력을 할 때에 우리가 그렇게 하는 한,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나 우리를 통하여 그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실 것이다.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하거나 생각하지도 말라. 우리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하며
그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기만 한다면 주님은 이 일을 하실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비밀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여러분이나 나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밀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진리이다.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믿지 않는가? 물론 믿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여러분과 나는 육신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밀은 여러분과 나와 같은 믿는 사람들 안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비밀은 죄없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고 죄있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죄없는 육신, 곧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안에 나타나시는 것은 조금도 비밀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죄와 죄의 성향을 지닌 육신에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비밀이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영광스러운 사실임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이 사실을 믿도록 하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큰 비밀이 인간의 생애와 경험에서
참으로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온 세상 앞에 나타내셔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도록 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2:14,17)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으며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후 5:21;사 53:6)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신을 쓰고 우리의 성정을 가지고 죄를 지시고 그 자신이 죄가 되셔서 이 세상에 살으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이 항상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이기게 하셨고
어디에서나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게 하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육신 곧 우리의 육신, 죄로 짓눌린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죄로 삼으신 바 되었으며
우리와 같이 연약하며 시험을 받으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비밀은 믿어 순종케 하려고 모든 나라에 전파되었다.
오! 이것을 믿자. 그리고 이것, 곧 육신, 인간의 죄에 눌리고 시험과 시련을 받는 육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오늘날이나 영원토록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으로 신자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타내게 하실 것이다. 이것을 믿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
이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 전해지는 오늘날에도 믿어 순종케 되도록 모든 나라에 다시 전해져야 할 비밀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 마쳐져야 할 하나님의 비밀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끝낸다는 의미에서
마쳐져야 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 안에 이 큰 사업을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마쳐져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이 모든 참된 신자들 안에서 신자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육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마쳐져야 할 때이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육신으로 나타내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긴 승리이다.
그러므로 이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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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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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는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0,11)
땅은 하늘에서 비나 눈이 그 위에 내려서 축축하게 젖기 때문에 초목이 나고 자랄 수 있다.
눈이나 비가 없으면 모든 식물이 시들고 없어질 것이다.
인간의 생애와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인간의 생애는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과 같이 메말라서 능력이나 선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소나기가 땅에 퍼붓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 내리게 하자.
그러면 우리의 생애는 주님의 기쁨과 평강으로 새롭고 아름답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할 것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없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고 "내가 그 말씀을 행하겠다.
내가 그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말씀을 이루며 또 우리는 말씀이 말씀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골 3:16)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충만하므로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도록 허용할 때에 우리에게 능력있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말씀에 충만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 말씀이 우리의 생애에 역사하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로 하여금 원하고 행하도록 하신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 나의 뜻을 이룰"것이다. 말씀으로 하여금 말씀을 이루도록 하자.
이 성경절들로부터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그 말씀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한다. 이것은 성경 어디에서나 말씀하고 있는 큰 진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사이의 차이점이다. 이것은 바로 "너희가 …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는 구절에서 강조하는 차이점이다.
사람의 말에는 그 말하는 바를 행할 능력이 없다.
그 말하는 바를 이룰 인간의 능력이 어떠하든지 간에 사람의 말은 그 말하는 바를 스스로 성취시킬 능력이 없다.
사람의 말은 그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을 말했을지라도 그 말을 이루기 위해서 말과는 관계없이
오직 그 사람 자신에게 의존하여야 한다. 말대로 행하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고 사람 자신이 그 말을 행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사람이 전혀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다. 이와같은 것이 인간들의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주님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 그 순간 그 말씀에는 산 능력이 있어서 그 말씀하신 것을 성취한다.
주님께서 그 말씀하신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 이에 대한 예화로 가득차 있으며 이런 예화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곧 우리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사람의 말로 보지 않고 또 이와같이 말씀을 진리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이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태초에는 세계가 전혀 없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며 그리하여 모든 세계가 제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 모든 세계가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말씀하신 후에는 모두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생겼는가? 무엇이 그 모든 것을 만들었는가?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것들을 있게 했는가?
그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이루었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영이 있고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 말씀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었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영과 창조의 능력으로서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창조할 때에 말씀을 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창조할 때에 그가 하신 말씀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였고 성경에서 그가 하신 말씀이 영혼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한다.
태초에 그가 하신 말씀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고 성경에서 그가 하시는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을 재창조한다.
이 두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업에서 말씀을 이루는 것은 오직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있도록 하자.
말씀을 받되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정말 우리 안에서 능력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도록 하자.
그러면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는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13:26; 20:32) (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10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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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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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능력은 오직 그 말씀을 하실 때에 모든 세계를 창조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았었다.
마찬가지로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 그 말씀을 받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 창조하기에 충분하다. 마태복음 8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와서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백부장은 무엇이 그의 하인을 낫게 해 주기를 기대했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뿐이었다.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후에 백부장은 치유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의지했으며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오직 말씀뿐이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 다른 어떤 방법으로 치료해 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었다.
그러므로 그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말씀을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며
그 말씀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오직 말씀만을 기대하고 의존하였다.
그리고 그 말씀은 원래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지금도 그 능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기 때문이다.
다시 요한복음 4장 46절에서 52절에 어느 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으므로 갈릴리의 가나에 계시는 예수님에게 와서, "청하되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이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이것이 "너희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받고 그들 안에 거하도록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다.
위에서 살펴본 두 이야기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에 일이 성취되었다는 것에 유의하자.
또 병자들이 예수님 면전에 있지 않고 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특히 요한복음 4장의 경우에는
그 신하가 와서 예수님에게 말한 곳으로부터 적어도 하룻길을 갈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말씀을 하셨을 때에 즉시 병자가 나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그 당시 말씀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같이 오늘날에도 살아있고 능력이 충만하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의존하는 것이 믿음이다.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말했을 때에 예수께서
주위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이스라엘 중 어느 곳에서나 이런 믿음을 만나 보시도록 하자.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말씀을 통해서 깨끗하게 된다.
주님은 그의 말씀을 떠나서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지 않고 그가 하신 말씀을 통해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곳, 오직 그곳에서 우리는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찾아야 하며
그 말씀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그의 순결한 말씀의 능력과 내재하심이 없이는 순결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신다.
한 문둥병자가 와서 예수님에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 8:2,3) 우리는 죄의 문둥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지금 말하지 않으려는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대답하신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면 즉시 우리는 그 문둥병자와 같이 깨끗함을 받는다. 말씀을 믿고 그 치유하는 능력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먼 옛날에 살았던 문둥병자를 위해서 믿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즉시 믿으라.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옛날의 그 사람들과 같이 이 말씀을 받으라.
그러면 즉시 우리 안에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그의 말씀을 오늘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자.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같이
지금도 이와같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10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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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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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1-23)
하나님의 의는 모든 사람이 맨 먼저 구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므로 의의 길에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의를 분리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우리가 읽는 이 시간을 말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났다. 지금 이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정말로 믿는가? 만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러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믿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하는가? 만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믿는 것인가?
주님은 그의 의가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가지 일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그 일이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진정으로 그를 믿는 것일까?
주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에 그렇다고 말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요일 2:8)
주님께서 한 가지 일을 말씀하시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라도 그 말씀은 참되다.
주님께서는 참되고 그들에게는 참되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말씀이 참되기를 원하신다.
그가 말씀하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참된 것이라고 인정할 때에 그
일은 그에게와 우리에게 참된 것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7)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렇다고 쉽게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용인하려고는 하나 지금 현재 그들 자신에게 그렇다고는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사람들이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롬 14:12)
만일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전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지금 참된 것을 믿지 않으면 전혀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제나 또는 내일 사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곧 지금 믿지 않으면 전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받아들이는 때이며 지금 구원의 때이다.
"이제는 …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가? 한 순간에 그 대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주님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자.
주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며 율법과 선지자들도 이것을 증거한다.
우리가 범한 그 율법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 율법, 바로 그 율법이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이 의를 주장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로 이 복스러운 사실을 증거한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는 정죄를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는 그의 의가 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은 그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이제는 … 하나님의 의가"
지금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
우리는 지금 죄를 짓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자 하는가?
하나님이 지금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이 의를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으므로 지금 이 순간에 이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되었느니라"는 말은 현재형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나 주님은 아직도 이 문제를 빠뜨리지 않으신다. 이 무한한 사실을 현재의 능력과 축복으로 강조하신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지금)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먼저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이제"라고 말씀하시고 다음에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이 모든 말씀을 강조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이때에) 나타내려 하심이니"
오! 가련하게 떨고 의심하는 영혼들이여, 이 말씀으로도 하나님의 의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보증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보증하지 않는가?
지금 이때에 지난 날에 지은 죄를 도말하시고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을
충분히 보증하시고 있지 않는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이것으로 주님을 만족스럽게 해 드리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롬 3:26)
이것으로 주님을 만족스럽게 해 드리기에 충분한데 우리를 만족스럽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이 충분하고 복스러운 의의 선물을 받지 않겠는가? 이 의의 선물은 생명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으면 주님은 다시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다.(사 53:11)
또 우리가 기뻐할 때에 이중으로 만족히 여기실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부이다.
왜냐하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이다.(롬 4:5)
지금 이 시간에 우리를 위하여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있다.
지금 이 말씀으로 의롭게 되지 않겠는가? 지금 이 말씀으로 살지 않겠는가?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이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참되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5,6)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이제","이때에" 이것은 참되고 그분에게 참된 것이다.
이제, 이때에 우리에게도 참된 것이 되도록 하자. (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11월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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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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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짓는 일에서 보호하실 수 있고 또 그러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한다.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7:4; 119:11)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며 그러므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길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후에 인간들에게 이 길을 가야한다고
강제로 정해놓은 길이 아니다. 그의 말씀은 구원의 길이며 성화(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주님이 일을 하시는 길이며, 주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에 의하여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시며 그의 말씀에 의하여 사람들을 다시 새로 창조하시며
그의 말씀에 의하여 이 세상과 거기에 있는 모든 만물을 재창조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너희가 거둡난 것이 …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시 33:6-9; 벧전 1:23;계 21:5,6)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같은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 간수하신 바 되어 …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5-7).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같은 말씀으로 보존되고
양육받고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 만물 중의 하나로 보호를 받고 있다.
모든 세계를 주님께서 붙드시고 또 제자리에 두셨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세계 뿐만 아니라 만물도 주님께서 붙드시고 제자리에 두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어느 별이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별이나 모든 세계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제 노선에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이에 못지 않게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제 노선에 있다는 것도 또한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이것을 믿고 의존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과 내가 해나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우주의 어느 혹성과 같이
확실하게 그리고 쉽게 주의 길로 지킴을 받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능히",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드리라."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유 24; 사 41:10; 롬 14:4)
오! 넘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이여 큰 세계를 붙들고 있는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의 말씀을 신뢰하자. 말씀을 완전히 의지하자. 전적으로 말씀 위에 머무르자.
그러면 말씀에서 쉼을 발견할 것이다.
주께서 태양을 붙들어 주시도록 신뢰하는 것처럼 우리를 붙들어 주시도록 주님을 신뢰하자.
태양을 붙들고 있는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한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내가 너를 붙들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너는 내 것이라"
"내가 과연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41:10; 히 13:5; 창 28:1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
"운동력이 있다"는 말은 "능력이 충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충만하여 그 말씀한 바를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룬다. 그 말씀을 믿고 신뢰하라.
왜냐하면 그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비하신 구세주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너희가 …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약 1:21; 행 20:32; 골 3:15; 벧전 1:5)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의 능력있는 말씀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미쁜 말씀" 곧 믿음이 충만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는다고 말씀하실 때에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이 말씀을 믿고 신뢰하여 그 보호하는 능력을 찾도록 하자.(리뷰 앤드 헤랄드 1896년 10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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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형식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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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치루신
큰 희생을 알지 못하고 제물 자체와 그 제물을 드리는 공로에 의하여 의를 얻으려고 하였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살아있는 믿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제정해 놓으신 모든 예배 의식과 제도가 변질되었다.
그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없으면 이런 모든 의식과 제도는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런 의식을 통하여 얻은 의에서 평강과 만족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으로 제정해 놓으신
이런 의식과 제도를 그들 자신의 생각과 고안에 맞도록 변질시켜 놓고 그 위에 그들 자신이 창안해 낸 일만 가지의 유전과 부당한 법과 까다로운 규정을 더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헛되이 의에 이르고저 하는 소망에 지나지 않았다.
랍비들은 소망이 없는 종교가 실제로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가르쳤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온 율법을 지키고 한 조목에서라도 범하지 않을 수 있고,
안식일의 완전한 준수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재난은 끝이나고 마침내는 메시야는 강림하시게 될 것이다." (성 바울의 생애, 파라 지음 37)
이 글보다 생명없는 형식주의를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글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와같이 그들 자신의 생애의 부족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휠씬 더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다른 사람들을 개나 돼지같이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믿음을 행사하여 주님으로부터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의롭다 하실 때에 그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며
바로 이 의롭다함을 받는 사실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어떤 탁월성이나 그가 행한 어떤 일의 공로 때문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탁월성과 주님이 행하신 일의 공로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의를 받은 사람은 자신 안에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견지에서 참된 믿음과 겸손으로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기를 좋아한다.(빌 2:3)
이와같이 그들 자신들이 행한 일을 곧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행한 일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 그들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낫게 생각할 때에 이것은 곧 바리새주의의 자기 의에 완전히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휠씬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떤 비교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는 하나님의 진리를 그들에게 전하며
이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파멸을 가져오는 폭탄 선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실제 생애는 어떠한가?
오! 그들의 생애는 불공평과 압제, 악의와 시기, 불화와 다툼, 험담과 소문을 퍼뜨리고 위선과 미천한 생애일 뿐이며,
법을 대단히 자랑하나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며, 그들의 마음은 살인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들의 혀는 그들 한 형제의 피를 흘릴려고 아우성 치는 한편,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려고 로마 법정 문턱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요 18:28)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태도에 대해서 과거와 현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현재 우리를 위하여 매우 간단한 두 성경절에서 아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의 열지파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때만 해도 아직 그들에게 은혜의 날이 있을 때였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여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 5:21-24)
이와 같은 시기에 유다 백성에게도 같은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미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0-15)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6-18)
주님 자신이 이러한 절기와 성회, 이러한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정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들을 싫어하시고 가납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훌륭한 찬양대가 악기의 반주와 함께 웅장하고 호화찬란하게 부르는 아름다운 합창과
이 모든 아름답고 놀라운 노래를 하나님은 단지 소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으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이런 절기나 성회나 희생이나 제물이나 노래를 제정하셨을 때에
이런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정하시지는 않으셨다. 이 모든 것을 주님 자신이 마음에 거하시고
생애에서 의를 행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나타내도록 하는 예배의 수단으로 제정하셨으며 의로 고아를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고, 공의가 물같이 흐르고 의가 하수같이 흘러 내리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주셨다.
화려하고 격식을 갖추었지만 헛된 과시만 하려는 목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한낱 소리에 불과할 뿐이나
진실하고 살아있는 믿음의 능력이 닿은 마음과 진실한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아버지여"라는 단순한 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기울이시는 귀에 상달되며,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이 임하는 노래가 되는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주님께서 이 모든 의식과 제도를 제정하신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생명없는 형식주의의 얄퍅한 겉치레를 위하여 사용할 수 없으며
의를 육적인 마음의 죄악을 가리우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죄를 씻어 버리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것,
오직 이것만이 이런 의식과 제도를 제정하신 주님의 가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바이블 엑호 1895년 1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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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의 형식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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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까지도 영원히 근절되어야 할
똑같은 죽은 형식주의가 득세하여 어디를 가나 기독교 신앙의 독버섯이 되어 왔다.
얼마되지 않아서 개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살며시 들어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을 높혔다.
그들은 살아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임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후 줄곧 그리스도가 없는 마음을 기독교의 신앙의 형식으로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만이 이러한 형식에 의미와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락한 교회에서는 한낱 침례 의식이나 심지어는 물 몇 방울을 뿌리는 세례 의식이 거듭남이 되고
성만찬 예식이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가 되고 한 교회와 가지는 연결이 구원의 소망이 되고 있다.
교회의 모든 의식이 다 이렇게 되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독교 신앙의 의식을 변질시키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그 위에 그들 자신이 창안한 일만 가지의 의식을 더하였다.
그 예를 들면 참회, 순례 여행, 유전과 까다로운 의식들이 있다.
그러므로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형식주의자들의 생애는 끊임없이 육신의 일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투쟁과 경쟁, 위선과 죄악, 핍박, 정탐, 배반 및 모든 악한 행위이다. 이것이 곧 교황권이다.
그러나 이 악한 형식주의의 정신은 기성 교황권의 울타리를 멀리 벗어나서
널리 퍼져 있으며 오늘날은 어디에서나 기독교 신앙의 해독이 되고 있다.
심지어는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곳에서까지도 이러한 형식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전 세계에 만연한 마지막 시대의 큰 악이 될 것이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 온 세상에 편만해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능력을 부인하기까지 하는 경건의 모양은
곧 죽은 형식주의인 것이며 이것을 대항하여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다.
셋째 천사의 기별로 온 세상에 가져다 주는 산 믿음은 전 세계적으로 휩쓰는 죽은 형식주의의 와중에서
우리를 구원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은 어떠한가? 우리는 죽은 형식주의자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인가? 우리는 능력없는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믿음으로 마음에 살아계신 구세주의 실제 임재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모든 예배 의식과 봉사에
하늘의 의미와 생명과 기쁨을 부여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며 모든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구세주로 발견하지 못하고 그를 믿는 산 믿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말씀 자체까지도 그가 세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형식주의가 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때에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그들은 그리스도가 없어도 그들 자신의 행위로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에 성경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책이 아니다.
성경은 곧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이것이 성경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참된 경건은 사상과 행위를 고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외적인 종교 의식은 기독교의 내적인 순결과 일치하며
하나님을 섬기는데에 필요한 이러한 의식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의식과 같이 의미없는 의식이 아니다."
(예언의 신 2권 219)(바이블 엑호 1895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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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장 3-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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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와같은 문안은 바울이 히브리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편지서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문안이다
그러나 이 문안은 결코 하나의 형식이 아니다.
이 서신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이요 진리이다.
그러므 로 이 문안이 자주 반복되고 있기는 하나, 자주 반복되고 있기때문에 우리에게 문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보내는 그의 은총과 평강의 완전한 보증이 될 것이다.
은혜는 은총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주신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바로 은혜로우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다.
그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 곧 무한한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할상 이르러 온다. 오!모든 사람이 이것을 믿기를 바란다.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평강이 아니면 참된 평강이 있을 수 없다. "내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57 : 21,20) .
모든 세상이 죄악 가운데 놓여 있지만, 그러나 평강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헤게 평강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요, "우리의 화평"이시며(엡 2 : 14),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의 육체로 원수된 것을 폐하셨으며,
그 자신 안에서 둘(하나님과 사람)을 한 새 사람으로 지어서 화평하게 하셨으며,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엡 2 : 14,15;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 으니" 곧 우리 모든 사람에게 평강을 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그분의 문안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우리에게 평강이 있으라"는 것이다.
오!모든 사람이 믿고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 3:15)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구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을 거절하지 말고 물리치지 말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오! 헝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아무리 죄짐에 눌리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게 하라. 그분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큰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스스로 모든 죄를 다 벗어버리고 그에게 나와서 완전히 그의 것이 되라고 하시지 않는다.
모든 죄를 가지고 나와서 모든 죄를 가진 그대로 그의 것이 완전히 되 라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로부터 모든 죄를 가져 가시고 그 죄를 영원히 없애버리실 것이다.
사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시고, 모든 죄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그가 사신 것을 가지게 하라. 그 자신의 것을 가지게 하라.
모든 죄를 지닌 채로의 우리를 가지게 하라.
그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리셨다는 것을 유의하라
이것은 곧 이 악한 현 세대에 속한 모든 것은 우리의 죄라는 것을 우리 각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악한세대)은 '우리 죄'이며 우리에게 속하였다.
우리는 그 죄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볼때, 이 악한 현 세대는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죄 안에 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라. 그는 우리의 죄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셨다.
그가 이 일을 하신 것은 이 악한 현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악한 현 세대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그가 사셔서 완전히 그의 것이 된 우리 자신과 모든 죄를 그로 하여금 가지게 하라.
그로부터 그의 것을 빼앗지 말고, 이 악한 현 세대에서 구원받기를 원할 때에,
여전히 이 악한 현 세대에 머물러 있지 말라.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붙들어 두려는 죄를 더 짓지 않도록 하라.
그것들은 우리의 죄이며,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리셨으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렸으므로, 우리의 죄는 그의 것이 되었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그는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것인 우리의 죄를 그에게 드리고, 우리의 것인 그를 우리의 죄 대신에 가지도록 하자.
이것은 축복받은 거래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육체로 거하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가지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된 것이다.
주님에게 감사하자. 왜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하지않겠는가?
왜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아멘'하지 않을 것인가?(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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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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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헌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아들의 믿음:KJV)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을 살펴봄으로,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상대적으로 강조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기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싶다거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씀하고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바을 안에 사신다거나,
또는 하나님의아들이 바울을 사랑하셔서 바울을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성경 구절에서 말씀하거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구절에서 말씀하신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와같이 이 구절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답고 견고한 터가되었으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였다.
누구든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모험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막연한 생각에 그치는 어떤 것을 믿는것이 아니다.
이것은 확실성이 없는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 곧 이미 이루어진 일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배에, 우리도 역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이름이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과 만 함께하신 하나님일때에 그러면 우리가 아닌 .그는 누구였는가?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그는 우리'가 되셔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우리'가 아니고 누구였겠는가?
이것은 이 성경 구절에서 알려주는 위대한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이시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혈과 육을 가지셨으며, 우리와 꼭같은 성향을 지니셨으며 모든 점에서 우리와같이 되셨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땅하도다 "(히 2 : 17).
자기를 비어 인간과 같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첫 아담이 우리 자신이었던 것같이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자신이셨다.
첫 아담이 죽었을 때에 우리는 그 안에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죽었다.
그러 므로 마지막 아담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그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었으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었다.
첫 아담 자신 안에 온 인류가 있었던 것같이 마지막 아담 자신 안에 온 인류가 있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온 인류, 곧 옛 사람의 죄있는 인성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룻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 : 6) .
이와같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환호 가운데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의 죄있는 인간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이 죄의 몸이 죽고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
항상 내 몸에 주 예수 죽인 것, 곧 내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주 예수의 십자가에 죽임을 짊어지고 다니는데,
이것은 예수의 생명이 나의 몸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을 넘기우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나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후 4 : 10,11). 그러므로 지금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산다 .
주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이 복된 사실은 모든 사람을 위한 믿음의 터를 놓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 그 안에 주어져 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혜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에게 데려가기 위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을 믿고 받으라. 이 위대한 진리에 복종하라.
완전히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영원토록 말하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아들의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을 말하라.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는 진리, 곧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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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10-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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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저주, 곧 일찌기 있었으며 또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저주는 단순히 죄때문에 생긴것이다.
이것은 스가랴5장 1-4절에서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선지자가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그 장이 20규빗이요 광이 10규빗" 이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다시 말하면, 이 두루마리는 온 지면에 있는 저주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온 지면에 있는 이 저주의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 그 답이 있다.
"무룻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룻 맹세 하는 자는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다시 말하면,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율법이며, 두 돌비에서 각각 한 계명씩 인용하여
두 돌비의 율법이 두루마리에 들어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적질하는 모든 사람, 곧 둘째 돌비에 있는 율법을 범하는 모든 사람은 이편의 율법을 따라 끊어질 것이며,
맹세하는 모든 사람, 곧 첫째 돌비에 있는 율법을 범하는 모든 사람은 저편의 율법을 따라 끊어질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의 기록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일일이 다 기록할 필요가 없고,
범죄할 때마다 해당하는 계명을 그 사람 에게 해당하는 두루마리에 표시만 하면 된다.
이러한 율법의 두루마리는 모든 사람에게 어디를 가든지 혹은 집 안에 있을 때에라도 따라 다닌다는 것을
다음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설명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들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율법의 두루마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주로 그 사람과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저주가 땅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을 그 큰 날 땅을 삼킬 때까지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권능'과 저주는 '율법'이기 때문이다(고전 15'56).
그러나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모든 저주가 그리스도에게 내려졌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이다(사 53 : 6).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바 되었다(고후 5 :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모든 죄에서 자유롭게 되기 때문에, 저주에서 자유롭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저주를 다 짊어지셨으므로,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에 저주가 땅에 내려서 가시와 찔레가 나왔지만,
예수께서 만물을 저주에서 구속하실 때에, 가시관까지 쓰시면서, 인간과 땅을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그의 이름을 찬양하자 구속의 사업이 이루어졌다. 주님에게 감사하자.
그가 나무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두 이미 완성하신 일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저주에서 구속하신 이 값없는 선물을 받을 때에, 그 두루마리는 여전히 우리를 따라다니기는 하나,
더 이상 저주가 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해 준다(롬 3 : 22).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저주에서 구속하시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이미 연구해서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이며, 이 의는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율법 챙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에서도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행위(일)를 주셨다.
율법의 행위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 불과하고 죄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행위는 믿음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선물로서 오직 의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챙위)이니라"(요 6 . 29).
이것이 참된 안식 곧 하늘의 안식이며 하나님의 안식이다.
그러므로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 . 10).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 ‥‥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며, 우리 자신의 행위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행위인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에게 미치게"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것은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 1-4) .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우리의 죄 대신에 하나님 자신의 의를 주시고,
우리의 율법의 행위 대신에 그 자신의 믿음의 행위를 말로 표천할 수 없는 선물로 주셨으며,
그리스도 예수안에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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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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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볼 때에, 두 율법을 구별하여 지금 보는 이 문제에서
하나님의 법을 제외시키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에 의무감 만을 허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분이며 이것을 부인하는 다른 어떤 성경 말씀이 있을 수 없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할례를 받든지 아니 받든지 간에,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만일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
곧 의무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여기서 하나님의 법이 제외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만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은 행할 의무가 조금도 없는 법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율법 전체'라는 말은
오직 희생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의문의 율법 전체만을 의미하여야 한다 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이 성경 구절이 그들의 불순종과 반대를 됫받침해 준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 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의무가 있으므로 할례를 받을 때에만 이 의무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할례를 받을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말하면서 십계명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령게 주장하는 양쪽이 다 잘못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 성경 구절에 들어있는 사상을 깨닫지 못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원인은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을 단지 '의무'라는 의미에만 국한 시키는데서 오고 있다.
이 말이 '의무'를 의미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인 의무와 관련된 모든 구절에서, 이 말은 단순히 의무 이상의 더 넓고 깊은 의미가 있으므로,
단순히 의무를 의미 하는 것은 사실은 이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갈라디아서 5장 3절의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은 빚을 지고 있어서 지불할 의무가 있는 사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이 상으로 완전히 빚구덩이에 빠져서 전혀 지불할 돈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천만원 의 빚을 져서 갚아야 하는데, 그 이상으로 돈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천만원은 갚을 능력이 있다면 빚 갚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큰 빚을 져서 12억원을 갚아야 하나, 한푼도 갚을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이 빚을 갚을 돈을 전혀 벌 수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은 단순히 갚을 의무를 가진 것 이상의 횔씬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우도 분명히 이와같은 경우이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서 말하는 사상이다.
이것이 여기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에서 담고 있는 '의무'이다.
이렇기 때문에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은 도덕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에,
오직 죄를 의미 하고 또 의미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5장 3절의 '의무를 가진 자'라는 이말은 누가복음 13장 4절에서 사용하는 말과 같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텁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 절에서 '죄'라는 말씀의 난외주석에 빚진 것'이라는 말씀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 말은 마태복음 6장 12절의 기도에서도 사용되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누가복음의 주님의 기도에서 이 죄의 사상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난외주석)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 : 4)
이 말은 역시 우리 구주께서 누가복음 7장 41,42절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가라사대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같은 말을 마태복음 18장 23-35 절의 비유에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누가복음 13장 4절에서 '죄'라는 말이 본 구절에서 쓰여지고,
'빚진 것'이라는 말이 난외주석에서 쓰여졌으며, 관주에서는 마태복음 18장의 비유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이 비유에서는 한 왕이 그 종들과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약 12억원 정도) 빚진자 하나를 데려" 왔으나
갚을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이 그에게 약 일만 이천원 정도 빚진 같은 종 하나를 만났을 때에
빚을 탕감 하여 주려하지 않고 일만 이천원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왕이 그 종을 불러다가 "그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 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 와 같이 하시리라"(마18 : 23-35).
빚진 종을 옥졸에게 넘겨 주인에게 빚진 모든 것을 다 갚도록 한다는 사상은 '빚진 자'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이 말의 사용은 빚진 자는 그의 죄를 속죄하지 않으면 안되는자라는 사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는 벌을 받거나 혹은 변상으로 속죄하여 빚과 같이 갚아야 하기 때문에
헬라어에서는 오페이레마, 곧 빚이라는 말로 불리어지고 있다'
위에서 본 성경 구절에서 알수 있는 것은 갈라디아서 5장33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는 자라"는 말씀에는 단순히 율법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의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구속력을 인정할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않되는 빚진 자 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더욱 알수있는 것은 그 자신으로는 영원히 빚진 자의 운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혀 갚을 것이 없고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갚을 것을 벌만한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빚은 지금부터 율법을 행하여 야 하는 의무가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과거에도 빚진 모든 것,
다시 말하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쌓인 모든 빚을 갚아야할 의무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5장 3절과 위에서 인용한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성경 구절에서 의미하는
모든 말씀을 볼 때에 모든 사람은 영원히 빚진 자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구원받기 위하여 할례를 받고 또 이와같이 자기의 의(義)의 행위로 구원받을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그들의 생애가시작한 때부터
마치는 때까지의 모든 빚을 하나님의 율법에 갚아야 할 책임을 맡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점에서 볼 때에 그들의 범죄에 따르고,
그 범죄로 축적된 모든 죄를 속죄해야할 의무를 떠맡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이것이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 일 뿐만 아니라,
그 거래에서 그의 빚에 관련된 모든 혐의를 벗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그 책임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 빚을 진 자들인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하고, 심지어는 계명을 행하고
그 외에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행하여 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누구나 그 행위로 말미암아
그 빚에 관련된 일체의 것을 갚아야 할 책임을 떠맡고 그것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능력이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완전히 망하여 생명이 없는 자들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가지면,
오직 주 예수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의존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빚진 자이기는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빚을 빚넉넉히 갚을 수 있을 만큼 풍족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고 변상을 하여, 각 사람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그가 가져오신 하나님의 의로
율법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생애에 요구하는 모든 빚을 갚을 충분한 의를 공급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선물과 부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오! 이것들을 믿고 받아 들이자. 가난하고 가련하고 생명없는 빚진 자들인 우리는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으라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사"도록 하자.(계 3 : 18 ; 사 55 :1) (리뷰 앤드 헤랄드 1900년 8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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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16-1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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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곧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갈 5'18 : 롬14).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의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롬 7 25).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 율법을 이룬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그 사랑을 가진 자들 안에서 율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누구든지 육신의 인도함을 받고 육신의 마음을 가지면, 육신의 일을 하며 따라서 그들은 죄의 법을 섬긴다
그러므로 두 개의 길, 곧 영의 길과 육신의 길이 언제나 모든 사람 앞에 놓여 있다.
육신이 있는 곳에서는 틀림없이 그 것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이 계시는 곳에서는, 틀림없이 '육체를 거스'린다.
그러므로 육신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모두 그들이 원하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없다.
그들은 죄의 법을 섬기고, 모두 율법 아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결코 율법아래 있지 않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성령의 길과 육신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는 것은 항상 자유이다.
"만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지금 보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다른 로마서나 골로새서의 구절에서, 육신이 여전히 그 육신의 성격과 죄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함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 육신이 성령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을 유의하라.
다시 설명하면, 우리가 개심하여 하나님의 영의 권세아래 들어갈 때에 육신으로부터 떨어지고
그 육신의 정과 욕심이 없어져서 더 이상 시험을 받지 않거나 갈등과 투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과 똑같이, 타락하고 죄있는 육신이 그 더이상 이러한 육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그 정과 욕심을 지닌 육신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서, 이제는 성령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극악무도하고 정과 욕심을 가진 육신을 정복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제압하는 권세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한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롬 8 : 13 : 골:5)
이 모든 죄악이 육신 안에 있으므로, 만일 육신이 군림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악한 일들이 근절되었으며 이와같이 하여 이제는 다시 생애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육신의 지배와 성령의 지배의 차이점을 로마서 7장14-24절과 고린도 전서 9장 26,27절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육신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람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으므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또 선을 행하려고 하나,
육신의 권세 아래 있으므로 그의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말씀은 육신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그의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육신의 권세를 깨뜨리고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 그 세력이 여전히 그를 사로잡아서
육신의 지배, 곧 그의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붙들어 맨다.
그러나 그 육신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외칠 때에
즉시 그 응답이 주어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여기 에 구원의 길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홀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이 이렇게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육신과 싸우는 투쟁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
육신과의 싸움이 없는 상황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직도 싸워야 할 싸움이있다.
그것은 싸우는 체 하는 거짓 싸움이 아니며 도깨비 장난같은 싸움도 아니다.
여기 고린도 전서 9장 26절 27절에서 말하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내 가 ‥‥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다.
무엇과 싸우는 싸움인가? 무엇을 치고 박고 하는가? 계속해서 읽어보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이 싸우는 싸움터는 자신의 몸이며,정과 욕심을 지닌 육신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육체는 지난 날 육신의 권세와 죄의 법에서 구원을 받을 때에 굴복했던 새로운 권세,
곧 하나님의 영의 지배아래 들어갔으며, 현재 그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것은 고린도 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이라는 말씀에서
'쳐 복종하게 함은'으로 번역한 헬라어보다 완전하게 번역을 하면 휠씬 더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보면, "눈 앞에서 때리고, 얼굴 시퍼렇게 멍들도록 치고 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코니베와 하우슨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싸우기를 허공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몸을 상처가 나도록 쳐서 강제로 복종"시킨다.
이와같이 로마서 7장은 육신의 권세와 지체 안에 있는 죄의법의 지배를 받으면서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고린도 전서 9장은 하나님의 영의 새로운 권세를 통하여 사람의 지배를 받는 육신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육신이 지배하고 사람이 그 지배 아래 놓여 있지만,
고린도 전서 9장에서는 사람이 지배하고 육신이 그 지배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스러운 역(逆) 현상이 개심할 때에 일어난다.
개심할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유가 되며, 하나님 영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능력으로 육신과 그 모든 정과 욕심을 지배하며, 성경을 통하여 육신을 그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능력을 받는 구원을 받았다.
우리가 시험이 없는 영역으로 구원을 받아 들어가서 품성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고(사실은 그런 곳에서는 품성의 계발이 전혀 불가능함),
시험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모든시험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이 계발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의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만일 우리가 모든 시험에서 벗어나서, 시험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와같은 구원으로는 결코 품성을 계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을 주시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있는 바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쓰시고,
그 모든 성정과 욕심을 지닌 바로 그 육신과 만나 정복하셨으며 믿음으로 가져오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신에죄를 정하'셨다.
이렇게 하여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믿음을 주시고,
육신의 권세와 죄의 법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육신을 지배하도록 하는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시험이 없는 곳에 두어 연약하고 특성이 없는 방법으로 구원하시려고 하지 않고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인간이 있는 바로 그곳에 계시고 인간의 모든 시험 가운데 처하셨다.
예수께선 인간이 가진 육신을 쓰고 오셔서, 그 육신이 당한 모든 시험에 마주치면서, 그 모든 시험을 정복하셨다.
그와같이 정복하심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셨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자.
그러므로 누구나 '예수의 믿음'을 받고 지키는 사람은 완전히 그 승리를 자기의 것으로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0년 9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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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22-2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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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우리는 육신의 일의 근본적인 악함과 거짓됨에 대해서 약간 보았었다.
그러나 주님에게 감사하자. 여기에 더 좋은 일이 있다.
각 사람에게 값없이 충만하게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자에게는 육신이 그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며, '육체의 일'대신에 '성령의 열매'가 그들의 생애에 나타나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을 열거하면서 설명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모든 사람이 육신의 모든 정욕과 욕심과 성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싸움을 싸우시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다. 그는 육신 그 자체가 되셨다.
다시 말하면, 그가 구속하러 오신 자들과 똑같은 혈과 육을 쓰시고 오셨던 것이다.
모든 점에서 인간과 똑같이 되셨으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었다.
만일 어느 한 점에서라도 우리와 같으시지 않았다면, 바로 그 점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이 육신의 욕망과 성향을 느끼셨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받는 것은 자기 욕심(자기 자신의 육신의 욕심과 성향)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약 1 : 14).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이 모든 일을 경험하셨다. 왜냐하면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욕심이 잉태'하고 야심을 품고, 죄의 성향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죄를 낳'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의 생각에서까지도 육신의 욕망을 품거나 그 뜻을 행하도록 시인하신 일이 없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의 죄라도 범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육신을 쓰시고서도 그 육신의 모든 욕망의 불을 완전히 끄시고,
모든 육신의 욕망을 그 뿌리에서부터 효과적으로 죽이시고, 이렇게 하여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을 뿐만 아니라,
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그 승리를 계속 이끌어 나가도록 하셨다.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신 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 4).
이러한 완전한 승리는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얻을수 있다. 이 승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
이승리는 완전하게 이루셔서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예수 믿음'에 의하여 거두고 계속 거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다(요일5 : 4).
그는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한 "원수된 것 ‥‥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다(엡 2 : 15).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육신을 쓰셨고 또 그 원수된 것이 존재하는 육신을 쓰지 않으면 안되셨다.
그러므로 "원수된 것 ‥‥ 을 자기 육체로 폐하"신 것은
"이 둘(하나님과 떨어진 인간)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원수된 것 ‥‥ 을 자기 육체로 폐하"신 것은
"십자가로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 곧 원수가 되어 있는 모든 인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엡 2 : 16). '원수된 것'이 '자기의 안'에 다시말하면 '자기 육체'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육체'로 그'원수된 것'을 죽이고 폐하셨다.
그가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것이 그의 육체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하여 예수님은 인류 위에 있는 모든 저주를 짊어지셨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갈 3 : 15).
그러나 "까닭없는 저주는 ‥‥ 이르지 아니하"하며, 또 결코 이르지 않았다(잠 26 :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그리고 우리 위에 저주를 정복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정복하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기 위해서였다(고후 5:21).
이와같이 하여 온 인류와 같이 완전히 불리한 처지에 자신을두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으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육신의 뜻이나 성향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셨으며 생각에서조차 허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모든 육신의 뜻과 성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뿌리에서부터 죽이고 하나님의 믿음을 통하여 인류에게 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 다 주셨다
이와같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2 : 14-18).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이룩하신 이 승리는 성령에 의하여
오늘 예수를 믿는 인간의 육신을 쓴 모든 사람들에게 옮기어지고, 그들을 구원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직접 오셔서, 그들 안에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소원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 :16-19).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죄와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죄있는 육신의 모든 정과 욕심과 성향에
계속 승리하도록 하는 구원은 과거 1870여년 전에 인간의 죄있는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것같이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들의 육신 안에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임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같으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같으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1870년 전의 복음과 같다. 그때에도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고,
오늘날에도 인간의 성정이 같은 것같이 죄인들의 육신, 인간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이 복음은 '영광의 소망'이신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다시 말하면 죄와 죄의 성정 등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죄의 성정을 위하여 그 자신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셨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다.
우리를 죄인 그대로 받으셔서, 복음 곧 '영광의 소망'이신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로 데려 가시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받도록 하였으며, '성령의 열매'가 '육체의 일'을 대신하여 너희안에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보도록 하자.
이 사랑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미움이나 이러한 죄가 생각에서까지도 나타나는 것 대신에, 오직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일을 전혀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어제나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며, 또 보상을.받기 위하여 사랑하지 않고 단순히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며,
또 오로지사랑할 뿐이기 때문에, 사랑 외에는 다른 어떤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희락(기쁨)은 "현재나 또는 장래에 기대되는 선으로부터 일어나는 불타는 행복"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또는'이라는 말이 없어야 된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현재와 장래에 기대되는 선에서 일어나는 불타는 행복이며 그 기쁨의 원인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쁨은 영원한 현재이며 영원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환희에 찬 만족'이다.
화평 - 이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완전한 화평이며, "모든 지각에뛰어"나고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믿음) - 이 믿음은 헬라어로 '피스티스'인데 그 의미는 '확고한 신념, 지식에 기초하지 않고
신뢰에 기초한 확신(머리의 믿음이 아니고 마음의 믿음이며 신조의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
신념에 의하여 마음에 품고 반대되는 모순을 완전히 부인하는 확신'이다.
온유와 절제- 절제는 자기 관리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그의 욕심과 정욕과 습관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여 자신을 다스리는 자유인으로 만든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법은 죄에는 아무것도 금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영의 열매가 아닌 모든 것을 금지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것이 죄 니라"는영원한 진리를 말하고 있을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가 성령으로 살고
성령 안에서 행하고 있기 때문에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그렇다. 이런 일을 해서도 안될 것이며, 또한 전혀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0년 10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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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존스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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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는 진화론을 주제로 하여 말씀 드리고저 한다.
여러분이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자신이 진화론자인가 혹은 아닌가를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먼저 진화론이란 무엇인가를 보고 그 다음에 이것을 설명하여 가면
여러분이 진화론자인가 혹은 아닌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용하는 글은 가장 저명한 진화론의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의 진화론에 관한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며,
지금까지 내린 진화론의 정의 중에서 가장 완벽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은 이 우주의 발생 과정을 미 결정체에서 결정체로, 단순한 형태에서 다양한 형태로 점전적인 변화를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우주 자체에 내재하므로 이와같이 변화된다고 가정하는 이론이다."
"진화는 이와같이 발전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동의어로서 하등의 세계에서 고등 세계로 보다 나쁜 상태에서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발전은 우리의 감정으로 판단하는 증가되는 존재 가치를 말한다."
이제 이점을 유의하여 보자. 진화론은 우주의 발생과정을 하등 세계에서 고등 세계로,
나쁜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 점진적인 변화를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와같은 변화 과정을 일으키는 능력이 우주 자체 안에 있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가 스스로 발전하며 그렇게 발전하도록 하는 주체는 우주 자체라는 것이다.
이런 발전은 "우리의 감정이 판된되고 증가되는 존재 가치"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우리가 더 나아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 나아졌으며 더욱 발전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발전했다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위치를 지배한다.
우리의 감정으로 아는 지식이 보다 못한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 변화된 우리의 발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발전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감정이 이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이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오늘 오후에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감정에 의하여 자기의 발전과 경험의 가치를 측정한다면 그들은 모두 진화론자들이다.
만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신도들이 된지 40여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들도
역시 진화론자들이다. 그들의 모든 신앙은 한낱 실속없는 공언에 불과했으며 알맹이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진화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글을 읽어 보겠다.
이 글을 읽으면 여러분은 진화론이 불신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진화론자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즉시 여러분이 불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화론이라는 가설은 만물의 시작 곧 창세에 관한 몇가지 의문을 풀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것은 곧 "자연을 우리의 시조와 우리의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고대 사상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진화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주로 이바지한 과학 중의 하나가 이 지구의 과거 역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랜 역사라는 시간 개념을
설정한 지질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다. 이런 방대하고 상상을 불허하는 기간은 진화론의 거물급 저자 중의 또 다른 한 사람 곧 바로
이 진화론의 창시자가 말한대로 진화의 과정으로 "인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기초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발전은
무수한 시대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그 시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순탄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많은 기복이 있었다. 수차에 걸쳐서 큰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었다가 그 후에 큰 변이,
곧 폭발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곤 했다. 그러면 다시 그 상태에서 진화가 시작되어 발전한다.
아주 여러번 이런 과정이 있었다. 이것이 하등 세계에서 고등 세계로,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변천하는 진화의 과정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발전하는 과정은 어떠했는가? 오르내리는 기복이 많이 있었는가?
여러분이 선을 행하는 - 하나님에게 속한 선한 행위를 하는 능력을 맨 처음 기독교 신앙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의 기복의 과정을 거쳐서 가지게 되었는가?
어떤 때는 큰 발전이 있는 것같고 선을 행하고 모든 일이 잘되고 즐거운 것 같더니 그 다음에는 일각의 예고도 없이
큰 변화가 이르러와서 모든 것이 일시에 망쳐지는 일이 있지나 않았는가?
그런데 이런 모든 기복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진화를 위해서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돌이켜 보면서 여러분의 감정의 판단에 의하여 약간의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여러분의 경험인가? 이것이 여러분이 지금까지 발전한 길인가?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진화론자가 아닌가?
변명하지 말고 정직하게 사실대로 시인하도록 하자. 오늘 오후에 여러분을 진화론으로부터 구하여 내기를 원한다.
진화론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곳에 진화론자로서 들어온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나갈 수 있다.
진화론자에 대해서 아주 명백하게 설명할 때에 여러분 자신이 지금 설명드린 그대로라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이 진화론자라는 것을 시인하라.
그런 다음에 줄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처방해 주시고 그 모든 형편에서 구하여 내실 구제책을 따르도록 하라.
그러나 여러분에게 설명드린 것이 여러분의 경험이었고 그것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경험했던
발전이었다면 여러분이 인정하든 혹은 않든지 간에 여러분은 진화론자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두고 싶다.
그렇지만 가장 최선의 길은 그것을 시인하고 다음에 그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진화론의 또 다른 면을 보자. "진화론은 어디까지나 물질을 영원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런 가정 하에서는 "창조론은 진화론이 적용되는 존재 영역에서 제거된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을만큼 발전을 하도록 보증하는 원리를 찾는다면 만일 그 원리가 여러분 자신 안에 내재하여 있으므로
그것을 올바로 작용하도록 하여 잘 관리를 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발전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점검했었다면 여러분은 진화론자들이다.
진화론이 어떠한 것인가를 좀 더 읽어 보겠다. "진화론은 분명히 창조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
진화의 사상은 이것을 대체로 우주의 형성에 적용할 때에 창조론과는 정반대가 된다."
이것은 진화론을 만든 사람들이 정의한 바와 같이 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자연히 발생하였으며 오늘날의 우주가 존재하도록 만든
이 원리가 이 우주 자체 안에 들어 있으며 이 원리에 의하여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이 완전히 발생된다고 가정하는 이론이다.
진화론은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진화론은 창조론과 정반대가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이 자연히 발생하였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진화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 곧 우주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진화론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화론에는 창조론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한편 창조론과 정반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진화론의 다른 면이 있다.
여러분에게 읽어드린 이 진화론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을 결코 불신자, 곧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믿음이 없으면 그들은 불신자이다.
물론 불신자라는 말이 오늘날보다는 더욱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러분에게 읽어드린 이 진화론을 만든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창조론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알지 못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믿음은 능력이 없는 믿음의 형식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이 새로 발생한 이론에 매료되었으며 이런 새 과학이 인기를 얻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도를 완전히 버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과 창조론이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창조자가 있는 진화론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진화론을 유신론적인 진화론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시작점이 어디든 간에 만물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셨으니 그후부터는 만물 스스로 진화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셨으나 그후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과정을 만물 스스로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변동이며 순간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방편에 불과하다.
이것을 진정한 진화론자들이 창조설에서 진화설로 변천하는 한 단면일 뿐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 진화론일 뿐이다. 왜냐하면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는 중간노선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런 종류의 사람이든 혹은 아니든 간에 심지어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신도들 가운데서도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지난날처럼 많지 않은 것을 인해서 주님에게 감사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의 길을 올바로 시작한 다음부터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두려워하고 떨지만 어떠한 구원을 이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계속 역사하시도록 하여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빌 2:13)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바위로 만들지 않았으며 인간이 원숭이나 유인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원숭이나 유인원은 올챙이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올챙이는 맨 처음에 원형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러면 왜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이것들이 만들어진 것들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러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재료를 가지고 있으므로 말씀을 하실 때에 그러한 것이 나타나게 되며 그것들이 만들어지고 구성하는
물질을 존재하게 만든다. 여러분이 이와같은 다른 성경 말씀을 알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이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의 질문을 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얼마 후에 그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말씀하시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가? (회중: 조금도 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는가? 6일이라는 긴 기간이 지나지 않았는가? 아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진화론이라도 그 기간을 무한정한 시대로 생각하거나
혹은 "6일간의 길고 무한정한 시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후에 보이는 것들을 형성하는데 지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론이고 창조론이 아니다.
진화는 오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창조는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셔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에 그 한 예를 들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빛이 생긴 시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가? 여러분이 이 문제를
똑바로 이해하여 자신들이 진화론자인가? 창조론자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질문을 다시 해보자.
말씀을 하신 시간과 그 말씀이 이루어진 시간 사이에는 6일간의 긴 기간이 있었지 않았는가?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는가? 아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일분도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일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시간과 빛이 존재하는 시간 사이에는 일초도 지나지 않았다.
(회중: 말씀을 하시자 마자 빛이 있었다) 그렇다. 이렇게 해서 빛이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 더욱 질문해 나갈 때에 지나쳐 버릴까 두려워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지도록 하나씩 보면서 넘어갈려고 한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때와 빛이 비치는 때 사이에는 일초도 없었는가? (회중: 그렇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일이 나타나는 것 사이에 어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진화론자이다. 만일 창조의 시간을 무수한 세월로 계산한다면
하루 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심한 진화론자이다. 같은 진화론자이기는 하나 그 이상이다.
다음에 하나님은 "궁창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때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궁창이 있었는가?
즉시 있었는가? 그렇다. 말씀하시고 그 일이 존재하는 것 사이에 무한정하고 매우 긴 기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진화론자들이다.
말씀하시고 그 일이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하루나 한 시간이나 일분이 지났다고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고 말씀하시고 또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를 맺는 과목을 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되니라".
그 다음에 하나님은 하늘에 두 큰 광명을 달고 별들도 만드시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되니라".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항상 그대로 되었다. 이것이 창조이다.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진화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지하고 믿지 않는 것 역시 완전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진화 자체가 창조와는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진화론이 창조론과 정반대가 되며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므로 진화론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가 된다.
물론 원래의 진화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또 절반 진화론자들,
곧 하나님께서 만물을 시작하였다는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을 도입하는 자들에게도 어떤 여지를 주지 않았다.
진화를 통하여 어떤 일을 이루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과 무한정한 시대가 걸리므로 창조를 폐지한다.
진화론자들이 창조는 즉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나 즉시 있는 행위를 믿지 않으므로 창조를 믿지 않는다.
창조는 즉시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창조가 아니다. 즉시 창조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화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있었던 창조를 다시 살펴보면,
그의 말씀 속에는 그 말씀하는 일을 만들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이것이 창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며 살아있고 세세토록 있으며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영생의 말씀이며 그 속성이 영원하고 세세토록 있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원토록 그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그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히 존재한다.
그 안에는 말씀한 일을 만드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많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에 나타나 있다.
그 모든 일을 다 인용할 필요는 없고 한두개를 말하면 여러분이 이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산상 설교 후에 내려오셔서 한 백부장을 만나셨을 때에 이런 말을 들으셨다.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말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예수께서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마 8:5-13)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었으며, 그 말씀을 맡은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그 책을 읽고 회당에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 나의 뜻을 이루며"라고 전파하였다.(사 55:1)
그 말씀을 읽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 말씀이 옳다. 그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 필요성을 보고
그것을 행할 것이다. 우리가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오랜 시간,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결코 이루지 못했다. 말씀을 행하는 그들의 행위는
사실은 너무 멀었으므로 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도 이런 외침을 하게 되었다.
"만일 한 사람만이라도 온 율법을 단 하루만이라도 지키고 한 조목에서라도 범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다.
만일 한 사람만이라도 완전한 안식일 준수에 영향을 끼치는 그 율법의 일점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때에 이스라엘의 고난은 끝날 것이고 드디어 메시야는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에서 말한 것을 행할려고 시작은 하였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말씀이) 나의 뜻을 이루며"라고 말했다.(사 55:11) 이와같이 창조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력을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그들 자신의 생애에서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가 그 뜻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그 말씀과 그들 자신들이 동의하는 점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위하여 그들 자신을 바라본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꺼려하는가?
그들이 진화론자들이었다고 말하기를 두려워말라.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으며 여러분 중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선은 창조론과는 정반대였으며 그 노선에는 어떤 창조도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했다. 그들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되지 않았다.
그런 변화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들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조를 믿는데서 아주 멀었으므로 그들은 창조자를 거절했으며 세상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이것이 진화론이 항상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창조론과 정반대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제 이런 사람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한 유대인들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라난 한 로마인이 있었다.
그 백부장은 예수님이 계신 곳 주위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 말씀의 결과를 보고 드디어는 그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말씀한 것은 무엇이나 그러하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제 그 말씀의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에게 가서 성경에 기록된 바 대로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래 좋다 내가 가서 너의 하인을 치료해 주겠다고 대답하셨다. 오, 아니요 주여 당신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하여 이 일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리라." 이 말씀이 나갔을 때에 얼마나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이 나았는가?
20년이 지났는가? 아니다. 그가 완전히 낫기 전에 많은 기복이 있어야 할 필요가있었는가?
이제 정직하게 말해보자. 아니다. 결코 아니다. 말씀이 나갔을 때에 말씀은 그 말씀한 일을 이루었다.
말씀이 그 즉시 이루어졌다.
또 하루는 예수께서 길을 가고 계셨을 때에 한 문둥병자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알아봤다.
그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력이 있다는 복된 진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에게 와서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막 1:41,42). 말씀하시는 시간과
그 일이 이루어지는 시간 사이에 일순간의 시간도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시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았다.
이제 여러분은 태초에 창조하실 때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말씀한 일을 이루는 창조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을 때에
여기 저기서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그같은 창조의 능력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재삼재사 강력하게 나타내셨고 그러므로 말씀을 하실 때에 창조의 능력이 거기에 있어서 그 일을 이루셨던 것이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진화론자인가 혹은 창조론자인가? 그 말씀을 읽었고 또 믿는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창조를 믿고 진화론자들을 불신한다. 이제 창조를 믿고 여러분 자신을 불신하는가?
오늘 여러분과 말씀의 창조력 사이에 어떤 것, 곧 어떤 시간의 개입을 허용하는 허위에 설 것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의 용서를 받기까지 얼마나 걸렸는가?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과 사함을 받는 일 사이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같은 말씀을 오늘 여러분에게 하신다.
왜 여러분에게 하신 이 말씀과 이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어떤 시간이 지나게 하려고 하는가?
얼마 전에 누군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일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일분이나 일초라도 지나게 하는 자는 진화론자라고 여러분은 말했다.
매우 좋은 일이다. 그 말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는다.
왜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죄사함을 말씀하실 때에 죄사함이 여러분에게 이르러 와서 여러분이 실제로 그 사함을 받기까지 전 생애를 소비하려 하는가?
그런 사람은 진화론자들이라고 여러분은 말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 여러분은 진화론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창조론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
오늘은 여기에 와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의미있는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결정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진화론자로 이 집을 나선다면 위험 천만한 일이다. 바로 지금 생사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여러분이 진화는 불신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진화론자로서 이 집을 나선다면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려는가?
만일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 이 집을 나선다면 여러분은 진화론자이다. 왜냐하면 말씀하시는 것과 그 일의 성취 사이에 시간이 지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읽어드린 것으로부터 그 하신 말씀과 이루어지는 일 사이에 어떤 시간이 지나도록 하는 자들은 누구나 진화론자라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형제들이여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자매들이여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콜린스 장노: 네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현재 시제를 강조하면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을 인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왜냐하면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그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모든 죄를 다 가져가시고 그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창조를 믿는다. 여러분은 믿는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 속에 있는 창조의 능력을 믿는가?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진화론자가 되어 내가 아주 악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려는가?
내가 옳게 행하려고 노력했었지만 많은 실패를 했었다. 많이 오르락 내리락 했으며 오히려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일을 휠씬 더 많이 했다.
만일 여러분이 하는 말이 이렇다면 여러분은 진화론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화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끗한 마음을 갈망하고 열망하여 왔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죄의 용서와 그외 모든 것을 믿는다. 만일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아주 많은 악과 정복해야 할 아주 많은 죄들이 있다. 그것 때문에 어떤 확신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는 말씀이 있다.(시 51:10)
깨끗한 마음은 창조에 의해서 오며, 다른 길이 없으며 그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라고 말씀하신다.(겔 36:26)
여러분은 이제 창조론자인가? 혹은 진화론자인가? 이 집을 나설 때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갈 것인가?
혹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나갈 것인가?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새마음을 창조할 창조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하신 말씀과
새 마음의 창조 사이에 일순간의 시간이라도 지나도록 허용한다면 여러분은 진화론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여러분의 생애에 이 말씀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변화 사이에 어떤 시간이 지나기를 허용할 때에 여러분은 진화론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그래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될 거야. 나는 말씀이 그 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들은 다음 집회 때까지 미루었다.
이렇게 수년간을 그럭 저럭 미루다가 바로 이런 진화론자들로 남는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경건에 속한 비밀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때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나의 분복인 것을 안다고 선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말씀 안에 있는 창조의 능력이 그 말씀하시는 일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믿음과 경건의 비밀에 속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영원한 분복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이런 죄있는 육신에 이렇게 나타나실 수 있는가는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이와같은 창조의 일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러분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할 수 있는 창조자와 같은 이런 존재가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이 단순히 진화로 되는가?
바로 지금 그리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신도들에게 지금부터 세상 끝까지 해야할 질문은
' 여러분은 창조주를 진심으로 믿는가? 여러분이 창조주를 믿을 때에 그가 어떻게 창조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그 말씀하신 일들을 여러분에게 창조해 주셨는가?
여러분은 다른 진화론자들에게는 창조론자가 되고 다른 창조론자들에게는 진화론자가 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또 다른 일을 보자. 말씀에는 "깨끗함을 받으라"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말씀한다.
그는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즉시 깨끗함을 받았다. 그는 지금 여러분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 모두는 어떻게 된다고 말하는가? (회중: 그대로 되니라)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그 창조의 말씀을 신뢰하라.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이르러 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창조의 능력을 인정하라.
성경에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 공간에 말씀하시어 하늘의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어두움에서 빛을 내시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을 때와 같은 말씀을 오늘날에도 여러분에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만일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새로 창조하신다.
여러분의 마음의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말씀하신 그 말씀이 만일 그 말씀을 받아 들인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빛을 창조하며
오늘 죄의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는 여러분에게 하신 그 말씀은 만일 받아들이면 즉시 여러분을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되도록 하자.
내가 어떻게 깨끗하게 될까? "깨끗함을 받으라"는 그 말씀의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깨끗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요 15:3)
여러분은 깨끗하여졌는가? 이 순간부터 창조론자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진화론자로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보라. 말씀을 읽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 말씀은 여러분에게
항상 무엇이 되는가? 오! 그 말씀은 창조이다. 창조의 능력이 그 말씀에서 말하는 일을 여러분 안에 창조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바로 그 창조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 창조는 여러분의 생애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의와 거룩함과 진리와 충성 모든 선하고 은혜스러운 일을 창조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만일 이렇게 될 때에 안식일 준수는 우리를 어떤 무엇에 이르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 곧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창조주를 알고 창조의 과정을 알게 되는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화론자인 한, 안식일 준수는 하나의 속임이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여러분의 생애에서 하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안식일 준수는 하나의 속임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곧 만물의 창조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1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을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선한 행실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선한 행실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진화론자는 노력하고 항상 노력할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지는 못한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오직 선한 행실을 하려고 맴돌고 있는가? 들으라.
창조자 자신에 의하여 그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는 그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지 않으면 지금부터 세상 끝까지 여러분 안에는 어떤 종류의 선한 것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이곳을 나갈 때에 선행을 하고 싶은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행실을 위하여 창조함을 받을 때에만 선한 행실을 할 수 있다. 선한 행실을 하려는 노력을 멈추라.
창조주를 바라보고 그의 창조의 말씀을 받으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골3:16) 그러면 그 선한 행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창조주와 함께 살고 창조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그 즐겁고 고요한 평강과 참된 힘과 성장이 있을 것이다.
그가 여러분에게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창조주를 인정하라.
오직 여러분 안에 창조된 선한 일만을 인정하고 창조되지 않은 어떤 선한 일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왜냐하면 주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면 선한 것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 주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감사하라. 이 구절에서도 진화론자가 될 것인가?
이 구절의 시제가 현재형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말씀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말씀은 창조하는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과 여러분이 새로 지음을 받는 것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용할 것인가?
태초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과 그 이루어진 일 사이에 단 일분이라도 허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진화론자라고 말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여기에서도 진화론자가 될 것인가? 자, 우리는 모두 창조론자가 되도록 하자.
이런 방법으로 하면 주님을 영광 중에 만날 준비를 하는데에 길고 지루함이 없을 것이며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날 준비를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러분이 진화를 통하여 준비한다면 결코 준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창조할 때에 분명하고도 신속하게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말씀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경건의 비밀의 주위를 맴돌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의 분복이라는 것을 널리 선포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어느 정도나 진화론자였는가를 아는가? 우리는 포기할 것인가? 자, 이제 창조론자들이 되고 그 일을 끝내자.
진정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이 되자. 주님을 믿자. 주님께서는 용서를 말씀하시고 깨끗한 마음을 말씀하시고 거룩함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창조하신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창조하시도록 하자.
진화론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그 창조하는 말씀이 여러분을 위하여 역사하게 하고 그 창조하는 능력이 그 말씀에서 말하는 바를 여러분 안에 이루도록 하자.
그러면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만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준비시키실 수 있다. 정말 바로 그 일에서 그를 만난다.
이와같이 그를 만나고 이와같이 매일 그를 만날 때에 그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믿는가?
그가 말씀하셨을 때에 모든 세계를 만드셨으며 그가 말씀하셨을 때에 그의 말씀에 의해서 빛이 나왔으며 그가 말씀하셨을 때에 문둥병자가 즉시 깨끗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들의 경우에는 말씀하신 시간과 그 사실이 이루어진 시간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 왜 진화론자가 되려고 하는가? 창조, 창조 바로 이것뿐이다.
여러분과 나는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청해야 할 것이다.(눅 14:17)
내 자신이 준비가 안되었을 때에 이렇게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나의 말은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며 단지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초청에 우리를 준비시켰고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씻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태양이 하나님이 표시해 놓은 노선에 붙들려 있듯
우리를 붙드시는 말씀의 창조력이 있을 때에 그때에 우리가 나가서 악한 세상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할 때에 그들은 들을 것이다.
그들을 그 초청에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나아와서 그의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들이 초청받은 잔치를 위한 준비를 즐거워 할 것이다.
지금은 이 세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때이다. 하나님의 표가 사람들 이마 위에 쳐지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하나님은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되지 않은 자위에 그의 인을 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의 인을 치시지 않을 것이다.
전혀 불의가 되는 의에 그의 인을 치시도록 하려고 하는가? 여러분은 뻔뻔스럽게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너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깨끗하게 씻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하신 일에 그의 인을 치실 수 있다. 여러분의 일에는 그의 인을 치실 수 없다.
그 자신이 승인한 문서에만 그의 인을 치신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그의 품성을 새기도록 하자.
그러면 거기에 그의 인을 치실 수 있다.
오직 그의 창조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그 뜻을 이루셨을 때에만
여러분의 마음에 그의 승인하는 인을 치실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주제를 완전히 끝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 것을 조금이나마 여러분이 알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가 마칠 때에 창조에서 멈추도록 하자. 더 이상 진화론자가 되지 말자.
여러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여러분 안에 성취된 일 사이에 일순간이라도 경과되지 않도록 하자.
이와같이 창조 속에서 살고 창조주와 동행하고 창조의 능력으로 붙잡혀 있고, 창조의 능력을 받은
이러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잠시 후에 전 세계를 움직이실 수 있다.
만일 처음에는 오늘(기도 주일을 마치는 예배였음)과 같은 시간에는 맞지 않는 이상한 문제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지금은 이 문제가 완전히 현대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는 오직 두 길밖에 없다.
중간 길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세계의 사람들은 창조론자나 진화론자 중의 하나이어야 한다.
진화론자들은 불신이며 그것은 사망이다. 창조론은 기독교 신앙이며 그것은 생명이다. 여러분이 살기 위해서는
창조와 기독교 신앙과 생명을 택하라. 오직 창조론자가 되고 영원히 창조론자가 되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아멘"하기를 바란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2월21,28일, 3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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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존스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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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 너희도 온전할"
방금 우리가 부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러"(찬미 487)라는 찬미는 "그러므로 ...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슴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마5:48)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에게 "완전한데 나아갈 것이니라"고 권고하고 계신다.(히6:1) 여러분과 내가 전하는 복음의 전파가 바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골1:28)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온전함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온전함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이 온전함을 기대하여야 한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이 온전함을 기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온전함의 표준에 완전히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로부터 온전함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한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말씀에서 여러분과 내가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확고하므로 여러분과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온전하게 되는 길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여러분과 나로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온전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함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며
여러분과 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가 행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주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온전함에 털끝만큼이라도 부족한 것은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도록
확고히 하자. 우리 각자가 이렇게 하기를 확고히 하고 또 영원히 이러한 태도에 변함이 없어야 하며
오직 그 길만을 구하도록 하자. 그러면 온전하게 되는 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 표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표준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이 그 표준이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유일한 표준이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그 표준에 확고하게 서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을 항상 구하고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의 표준을 허용하지 않을 마음의 태도를 가지지 않을 때에 우리 자신이 그 온전함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결코 변명하거나 구실을 붙일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크거나 전능하거나 전지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은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함은 하나님과 같은 품성의 온전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이 표준을 세우셨고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오직 이것만을 기대하여야 하며 오직 이것만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러분과 내가 가져야 하는 하나님 자신의 온전함이며 우리 자신이 그것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항상 그 표준에 머무를 때에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공의 앞에 계속 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우리 모든 사람이 의롭다든지 혹은 악하든지 간에 서야 할 곳이다. 그러면 왜 거기에 서서 그 일을 마치지 않는가?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고 거기서 우리 모두가 그 표준에 의하여 심판을 받기로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것을 세상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서약이다.
여러분과 나는 그 부활을 믿는다. 그러면 왜 그곳에 들어가서 확고하게 서지 않는가? 왜 기다리는가?
기다리고 또 계속 기다리는 자들은 그곳에 들어가 설 수 없을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은 이 심판에 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서 심판의 표준에 이르며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에서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어느 순간에도 심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그곳에 있으며 그 심판을 통과하고 있다.
그들은 심판과 그 심판이 가져오는 모든 결과를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거기에 서서 그 위로 중과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표준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안전하다.
이 일에서 오는 축복은 바로 지금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하여 누구나 필요로 하는 모든 보상이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을 때에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두려움을 내쫓을 때에 그 일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오직
우리가 심판에서 그 심판의 완전한 표준에 이르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에만 이르러 올 수 있다.
이것은 해결되었으므로 이제 그 길을 알아보자. 이 길이 우리의 전부이다. 나의 표준은 참된 표준이 아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유일한 표준이다. 그런데 누구의 표준이 측정이나 누구의 표준의 판단이 적절한 것인가?
나의 측정이나 판단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측정할 수 없다.
이 말씀을 기억하는가? 아마 이 순간에 이 말씀이 생각날 줄로 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시 119:96)
유한한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볼 때에 우리는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온전함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으로 판단하는 하나님 자신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나 내가 판단하려는 모든 계획이나 이에 관련된 모든 일을 완전히 버리게 한다.
내가 표준을 측정할 수 없을 때에 비록 그 일을 하도록 준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완전히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이것 역시 오래 전에 말씀하였다.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마디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나를 호출하겠느냐?"
그러면 내가 탄원하러 올 때에 무엇을 탄원할 것인가?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측정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그 측정된 결과를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과 동떨어질 때에 내 자신의 판단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완전히 정죄한다.
그 안에는 칭의의 기초가 없다.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내 자신의 온전함에 표준은 하나님의 온전하심 앞에 놓고 볼 때에 너무나 초라할 것이므로 내 자신이 그것을 천히 여길 것이다.
"내가 눈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욥 9:2,3,19-21,30,31)
만일 우리에게 표준을 주어 이르도록 하셨다면 우리가 그 표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온전함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모든 생각을 영원히 버리도록 하자.
온전함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대하시고 또 이를 위한 준비를 해 두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함을 받은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품성의 표준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품성이 우리의 품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품성 중의 하나만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품성 자체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가져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성경 세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 첫번재 말씀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시작하여 4절에서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관하여 가지고 계시는 그의 유일한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모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러할 때에 왜 우리가 거기에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 왜 우리가
바로 지금 우리의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어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두번째의 성경 구절은 골로새서 1장 19절로 22절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목적으로 만드셨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이런 뜻에서 완전히 이탈되었고 모든 뜻이 좌절되었지만 그는 십자가를 참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기를 기뻐하셨고 그리스도께서도 이와같이 하기를
기뻐하셨다.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화목시켰고 이 원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
이 뜻은 세상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가져오신 그리스도의 보혈과 화목과 평강은 우리를 거룩하게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가지셨던 일을 이루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곧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길, 곧 그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분이 그 길로 오셔서 우리에게 그 길을 가져다 주셨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내가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분 자신이 이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조금도 이 일을 하러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제 에베소서 4장 7절로 13절에 이 일에서 무엇이 정말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그 필요를 얼마나 충만하게
공급하셨는지를 보도록 하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이제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의 선물은 무엇을 이루는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룬다.
(골1:20)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신 자들로,
다시 말하면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런 역사를 하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정하신 뜻을 이루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한 길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에게 같은 분량을 따라 바로 지금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 안에 이루신다.
이제 계속해서 읽어가 보자.
그러면 이것은 모두 온전함이라는 말 자체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는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이여 이 선물들을 이런 목적으로 주실 때에 우리는 그 사실에 직면하여 그 선물들을 갈망하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뜻을 이루는 선물들을 받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이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주셨고 하나의 분명하고 뚜렷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시고 그 뜻이 이루기까지 주셨다.
그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셨으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주셨다.
이와같이 온전함은 우리의 유일한 목표이다. 하나님의 표준은 유일한 표준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표준에 이르도록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없고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 목적이 죄에 의해서 좌절되었을 때에 그의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그 표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셨으며
성령의 선물들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이것을 확실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묻는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향하여 오직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가?
유다서의 24절은 지금까지 읽고 말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신 것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모든 기회를 잃었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 하셨다.
그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는 권리를 사셨다.
이 일을 할 권리가 오직 그에게만 있다.
여러분과 나는 이 일을 하도록 주신다 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가 이것을 상실하였을 때에 갈바리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이것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 값을 지불하신 분 외에는 아무도 갈바리의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 값을 지불하신 분만이 우리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값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
그 권리는 갈바리의 십자가의 권리에 의하여 오직 그에게만 속한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은 이 일을 이룰 책임을 짊어질 권리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그러므로 이 일을 이룰 책임이 그분에게만 있다.
그는 "능히 … 하실 자"이다. 그는 "능히 …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이다.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그분이 십자가가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능히 …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이다. 언제 하실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언제인가? (청중:지금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는 과거에나 미래나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의 길에 의하여 그것은 바로 지금 또는 언제나 여러분과 나에게 이르러 오는 것이
항상 사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이것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연구하자.
로마서 5장 21절을 읽고 그 다음에 6장 전체를 쭉 훑어 보라. 이 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로마서 5장의 마지막 두 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같이","또한"을 비교, 아니 대조해 보자. 비교는 결국 대조하기에 이른다.
"죄가 … 왕노릇한 것같이" 우리는 죄가 어떻게 지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죄가 어떻게 다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도 죄가 어떻게 왕노릇한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죄가 왕노릇할 때에 그 지배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일을 하는 것보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더 쉽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마는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것이 죄의 지배이다.
그러므로 죄가 다스렸을 때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쉬웠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은혜가 다스릴 때에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쉽다.
이것은 비교이다. 주의해 보라. 죄가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왕노릇한다.
죄가 지배할 때에는 그 지배는 은혜를 거스렸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능력을 뒤로 물리쳤다.
그러나 죄의 권세가 꺾이고 은혜가 지배할 때에 은혜의 지배는 죄를 거스리고 모든 죄의 권세를 물리친다.
그러므로 죄의 지배 아래서는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같이
은혜의 지배 아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길은 분명하지 않는가? 그 길로 가자.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회중: 그럴 수 없느니라) 여러분이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죄짓지 않도록 금하셨고 여러분이 그것을 시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조금도 죄짓지 않도록 금하시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시인하는가?
여러분은 은혜의 지배 아래서 전혀 죄짓지 않도록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시인하는가? (회중: 그렇다)
그러면 여러분과 내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뜻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기대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절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뜻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2절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는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어떻게 더 살겠는가?
그러면 2절에서 무엇을 의도하는가? 우리가 전혀 죄 가운데서 계속 있지않을 것을 뜻한다. 죽으면 장사 지내게 된다.
침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어 장사되었으며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이제 여기서 세가지 점을 보도록 하자.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알고 있다.
무슨 목적으로 못박혔는가? "죄의 몸이 멸하"여지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만일 죄의 몸이 죽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섬길 것이다.
만일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면 죄의 몸이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길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 각자가 해결할 유일한 질문은 죄짓는 것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에게 지금 이 순간에 죄짓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를 원한다는 문제가
영원히 해결된다면 죄를 결코 짓지 않을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죄를 섬기는 일에서 자유스럽게 되는 길은 오직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죄를 선택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와 죽음을 선택하는가? 죽음을 택하여 죄를 면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죄도 택하고 죽음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죽음을 피하고저 하는 자는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죽음을 만난다. 죽음을 선택하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죽음의 길은 곧 구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희생을 치르셨다.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가? 참으로 죽기를 원하는가? 누구든지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결정하고
그의 손에 영원한 카드로 들고 그의 생애의 매순간마다 죽는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죽음은 즐거운 것이 아니고, 옛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의 선택으로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나 죽이는 사람에게는 쉽다.
이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쉽고 이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죽음을 영원히 계속하는 것은 더 쉽다.
언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언제 우리를 그의 영광 앞에 흠없이 세우는가? 지금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길은 죽음의 길이다. 지금이 죽음을 선택할 때이다. 지금이 우리 자신을 영원히
죽음에 넘겨주는 때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뒤로 물러나고 죽음을 피한다면 무엇에서 피하고 있는 것인가?
구원에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죽음과 같이 보이는 곤경에 처하는 어떤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를 섬기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종은 그리스도의 기쁨을 생활화시킨다.
왜냐하면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기쁨과 지속적인 평화와 만족감은 여러분과 나에게
이르러 올 수 있는 모든 죽음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억지로 하는 힘든 일이 아니고 일찌기 없었던 가장 웅대한 일이 된다.
십자가의 죽음, 그후부터는 죄를 섬기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
왜 그러는가?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롬 6:7) 주님에게 감사하자.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나와 여러분의 생애에서의 유일한 질문은 나는 죽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죽지 않았으나 이 죽음을 가져오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면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 유일한 결과이며
그리고 그것은 이 모든 댓가를 치룰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역시 다음 구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1절에서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의미한다. 2절에서도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의미한다.
6절에서는 우리가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7절에서는 죽은 자는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며
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디에서 사는가?
의 가운데서 사는가? 그렇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사는가?(회중: 의 가운데서 산다) 매우 잘 대답했다.
그러면 로마서 6장의 1-2절과 6-8절은 모두 우리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9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어떻게 해서 죄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는가? 죄 때문이다.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알지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바 되었다. 그때부터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는 영원히 죄와 모든 죄의 결과에 대하여 승리하셨다.
그러면 이 구절은 여러분과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그와 함께 일어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그러므로 9절과 10절 역시 우리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11절에서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와같이 그는 우리가 죄짓지 않게 될 것을 말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헤의 지배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초월하게 하여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하며 죄의 권세를 거스리고 우리를 죄짓는 것에서 구원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같이 로마서 6장 1-14절에 이르기까지 거듭거듭 죄와 죄짓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전파하고 있다.
이것은 큰일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더 나아가야 할 일이 있다.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 6:2)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때에 누구에게 순종했는가? 하나님에게 순종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를 섬기기 위하여 자유롭게 된 그의 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애에 어떤 공백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지성적인 섬김이 있을 것이며 그 결과는 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우리가 의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도록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크게 외치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그러한 것이다. 이것을 인하여 감사드리자.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주님에게 감사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셨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직 다 된것은 아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여러분과 나의 경험에 호소하신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이것을 보충해 보자.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는 의에 대하여 자유한 죄의 종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자유한 의의 종이다.
내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였고 주께서 그 모든 것으로 내 영혼을 먹였으므로 가끔 천사의 노래를 "길게 뽑아내는 선율이 아름다운" 노래라고 말하는 밀론의 시가 생각난다.
이 로마서 6장은 길게 뽑아내는 선율이 아름다운 노래 중의 하나이다.
로마서 6장은 죄로부터의 자유로 시작한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다.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죄짓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것도 위대한 일이다.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의에게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도 위대한 일이다.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것도 위대한 일이다.
이 모든 것 위에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길게 뽑아내는 선율이 아름다운 주님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오! 이것을 받아 깊이 생각하고 그 아름다운 음조를 붙잡아서 주야로 우리의 심령 안에 머물게 하라. 그러면 이 노래는 우리의 심령을 선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로서 죄의 몸을 죽게 하고 죄짓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의를 섬기도록 하고
거룩함에 이르게 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함에 이르게 하고 영생에 이르게 한다.
다시 한번 선물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기까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있다는 말씀을 보도록 하자.
모본을 보여 주신 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죄의 세상에서 죄있는 육신 곧 여러분과 나의 육신을 입고 세상의
모든 죗짐을 지고 가신 길-그가 온전함 가운데서 그리고 온전함에 이르도록 가신 길은 우리 앞에 놓인 길이다.
그는 성령으로 태어났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셔서 다시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는 우리를 위하여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그는 죄가 없었지만 죄가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셨다.
그는 살아 계시고 생명의 왕이요 창시자이시지만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셨다.
그의 나오심은 영원전이지만 육신으로 태어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과 내가 거듭날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의의 세계에서 죄의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세상에서 의의 세계로 거듭나게 하셨다.
그가 다시 태어나시고 인성에 참여하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고 신성의 참여자들이 되게 하셨다.
그가 다시 태어나시어 땅과 죄와 인간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서
하늘과 의와 하나님에게 이르게 하신 것이다.
커버트 형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를 형제로 만든다고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형제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셨다.
이것은 성경에 쓰여져 있고 마리아에게 한 말씀이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25)
성령으로 나시고 다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서
이 세상에서 생명과 품성의 장성함에 이르셨으며 거기서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은 온전함에 달했었다.
다시 태어나시고 성령으로 나시고 우리와 같이 혈육으로 나시고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시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었다.(히 2:10; 5:8,9)
이와같이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쓰시고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을 쓴 우리가 온전함에 도달해야 하는 곳은 고난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라나면서 항상 온전하셨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맨 끝만을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그러나 맨 끝은 맨 처음에 도달되지 않는다. 다시 에베소서 4장을 보도록 하자.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이 온전함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에 이를 수 있는가를
여러분과 나에게 제시한 말씀이다. 내가 13절을 읽었는데 14-16절을 같이 읽어보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것은 여러분과 내 안에서 자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이며
하나님의 지혜의 성장이며, 하나님의 품성의 성장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성장이다.
그러므로 이 성장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새로 태어날 때에 인간 안에 심기어진다.
그 사람은 다시 낳으며 성령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심기어져 있으므로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얼마나 많은 일에서인가? "범사에" 자라나야 한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그리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씨가 심기어진다. 밤낮으로 씨가 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씨는 어떠한가? 완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씨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씨는 지금 싹이 튼다.
그 싹이 어떠한가? (회중: 그것 역시 완전하다). 사실인가? (회중: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곡식의 이삭이 아니다. 튼튼하게 서 있는 줄기도 아니다.
이것은 땅 사이에서 갓 나오는 싹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싹은 어떠한가? 그것은 완전하지 않는가?
(회중: 완전하다) 성장하는 매 단계도 완전히 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하다. 그렇게 보지 않는가?
더 이상 이러한 잘못된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도록 하자. 그런 생각을 버리라.
그 싹이 땅을 뚫고 나올 때에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좀 더 보라.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이 지상에 일찌기 나타난 잎사귀와 마찬가지로 완전하다.
그러나 겨우 땅에서 기어나온 호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전부이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이기 때문에 완전하다.
하나님은 그것과 관계를 가지신 유일한 분이다. 그렇게 보지 않는가? 이것으로 됐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좋은 씨로 거듭났으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태어나고 그 완전한 씨로 낳았다.
그 씨가 싹트고 자라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특성을 본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완전하시다. 그러면 바로 거기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회중: 완전하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서 거듭나고 하나님이 직접 그 일을 지도하신다면 그 일은 어떻게 될까?
완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점에서
보좌 앞에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신다. 그 싹은 자라서 땅위에 선다.
곧 다른 잎이 나와서 잎이 둘 있게 되며 각각 다른 잎과 마찬가지로 예쁘다. 셋째 잎이 나타난다.
이제는 줄기가 되어 여전히 자란다. 이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정말 다른 모습이지만
그러나 전과 같이 온전하다. 마지막 온전함에 더욱 가깝게 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나 궁극적인 온전함에 더욱 가까워졌기는 하나 지금 서 있는 모습이 전에 땅에서 나올 때와 같이 온전하다.
때가 되면 키가 더 크다. 이삭이 맺힌다. 그 위에 꽃이 핀다. 그 꽃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마침내 여물고 완전한 곡식 이삭이 나타난다. 곡식 알은 모두 완전하다. 하나님의 일이 거기에서 끝마쳐진다.
완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 시작하셨을 때에 하신 생각을 따라 온전함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성장에 의하여 온다. 그러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샘이므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만이 자랄 수 있다. 그만이 자라나게 하실 수 있다.
그만이 완전한 모본을 안다. 그리스도는 모본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모본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 모본을 따라 온전함 가운데서 자라도록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에서 역사하였던 같은 능력과 생명이 이 성장에서도 역사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인간의 육신을 쓰신 한 어린아이로서 시작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치신 것과 같이 여러분과 나는 거듭나서
모든 일에 그 안에서 자라나서 곧 그와 같이 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할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기를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했기 때문이다.(계 10:7) 우리는 지금 그 날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세상에 전하라고 주신 그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 비밀이 세상을 위하여 마쳐져야 하고 또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들 안에서 마쳐져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그 비밀이 십사만사천인 안에서 마쳐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쓰신 하나님의 일, 육신 곧 여러분과 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일이 마쳐져야 할 것이다.
여러분과 내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마쳐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가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가? 주님의 길이 온전함에 이르는 좋은 길이 아닌가?
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히 6:1,2)
그가 우리를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있었던 불안정한 터에서 해방시키셨다.
유일한 터는 의로 섬겨 거룩함에 이르고 그 마지막은 영생이 되는 터가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맡기면서 심판을 만나고저 하고 그 앞에 설 준비를 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이 일이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오로지 하나님,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표준, 모본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일이
항상 모든 일에 어디에서나 그리고 영원히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담대하라.
처음에나 마지막에나 언제나 그리스도가 되게 하자.(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7월 18일, 8월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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