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기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믿음의 본질(1)

 

 


E.J. 와그너

 

 

   믿음으로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롬 5:1)라는 말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 9).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 28).

   복음은 자랑하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며 자랑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의도의 자연 발생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은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행위―선한 행위는 복음이 이루는 하나의 큰 목적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여기에는 모순이 조금도 없다. 다른 점은 우리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 사이에 있다. 우리의 행위는 항상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행위는 항상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주제 넘는 생각이다. 다섯살 된 아이가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웃을 것이다. 하물며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선행은 하나의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고 행위이며 이 행위는 오직 살아있는 인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홀로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행위만이 가치가 있을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행위를 가진 사람만이 의롭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그 행위를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행위이다.

   자기 만족에 빠진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 29)고 대답하셨다. 믿음은 역사한다(갈 5:6; 살전 1:3 참조). 믿음은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시게 하기(엡 3:17 참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며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있다(골 2:9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스도 안에 계시면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면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생애 가운데에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빌 2:13)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 필요가 없다. 이루어진 사실로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인 자신에게까지도 항상 하나의 비밀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다(골 3:3 참조). 그리스도인 자신도 볼 수 없을 만큼 감추어져 있다. 인간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며 복음의 비밀이다(골 1:27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미 예비해 두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런 선한 행위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런 선한 일을 예비해 놓으셨는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믿지 않는 자들)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히 4:3-5). 그러나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

   그러므로 안식일, 곧 주일 중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표로 주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겔 20:12, 20 참조). 안식일 준수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와 조금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인준하는 표와 인이 되며,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표이다. 안식일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쉬는 것이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쉬는 표이다.

   제 칠일 외에 다른 날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안식하는 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날에만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제 칠일의 안식이다. 주일 중에서 이날만이 쉬는 날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행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일 중 첫째 날을 포함하여 다른 엿새 동안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그 육일 동안에는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육일 동안에는 언제나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요 3:21)이면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매일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여야 하나 제 칠일만은 그 안식의 표가 될 수 있다.

   이미 제시한 진리의 자명한 결론으로서 두 가지 점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에서 쉬는 표로 제 칠일을 지키지 않고 다른 날을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표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의 방법으로 대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우월하며 인간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의 표가 된다. 다른 날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표로 주신 날 외에 다른 날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단순히 완전하고 충만한 믿음의 표현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실함과 하나님이 그들의 진실한 믿음을 받으시는 사실이 그들이 지키는 날이 인간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표라는 사실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경고를 들을 때에 재앙이 만연한 집에서 나온 것처럼 배도의 표를 버릴 것이다.

   또 다른 점은 안식일이 믿음의 표이고 어떤 사람도 믿도록 강요받을 수 없는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결과로 자연히 생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강요하여 믿도록 할 수 없다. 사람들을 강요하면 그들이 믿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짓말 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21). 그러므로 안식일은 완전한 믿음의 표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의 표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율법의 일부로서 신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과 신뢰가 없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쉬는 날인 제 칠일까지도 외적으로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바이블 에코 1896년 8월 17일).

   구원하는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 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6-9).

   이 말씀을 특히 마지막 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일 그대로 받아들이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으로 구원에 필요한 어떤 무엇이 더 있지 않은가? 첫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마지막 두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성경절들을 말한다. 너무나 분명한 말씀이므로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닐 수 없으며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죄인이 의지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 한 예로서 빌립보의 간수의 경우를 들어보자. 바울과 실라가 무자비하게 매를 맞은 후에 이 간수가 그들을 맡아서 지키게 되었다. 그들은 등이 찢기고 발에는 쇠고랑을 찼었지만 밤중에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찬송을 드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은 뒤흔들리고 모든 감옥문이 다 열렸다. 만일 그가 지키고 있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을 친다 하더라도 그 간수가 두려워 떨었던 것은 발아래 땅이 흔들리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에 대한 공포나 무서운 로마의 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지진을 바울이 전파한 큰 심판의 예고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하고 말했다. 바울이 그에게 한 대답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 사람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심정에 눌려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만족스럽게 했던 바울의 대답은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간수의 찢어질 것같이 우러나오는 호소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대답을 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바울의 로마서에서 인용한 말씀과 너무나 일치한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대답에 유의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 29). 이 말씀을 금으로 써서 모든 심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앞에 두고 계속 보도록 했으면 좋겠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것이다. 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믿음으로 다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믿음은 행위를 이루기 때문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담고 있으므로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대개 믿음에 대해서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이며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므로 능동적인 행위가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능동적인 것으로서 가장 실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현실적인 기초인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사 51:6, 7 참조)이며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만(마 6:33 참조), 믿음이 없이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심판대에 설 유일한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빌 3:9) 자가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의 귀절에서 바울이 한 말씀을 읽어 보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보좌만큼 견고하고 변함이 없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서 무슨 악한 말을 하고 유린하며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은 영원토록 동일할 뿐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불순종하여 그들의 마음에 율법의 효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민수기 30장 15절에서 “지키지 않은 서원은 폐하여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 믿음과 불순종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아무리 범법자가 믿음을 공언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범법자라는 사실은 그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소유는 마음에 율법을 굳게 세워서 하나님에게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믿음 하나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잠깐 동안 말씀을 보도록 하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직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죽은 율법주의로 바꾸어왔다. 그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기록한 말씀과 거의 하나같이 일치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행위가 없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죽은 것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을 가졌다면 행위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며 그렇게 된다고 해서 믿음이나 행위를 자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랑을 배제하기 때문이다(롬 3:27). 자랑은 오직 죽은 행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허울 좋은 흉내로 믿음의 공언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야고보서 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그의 악한 행위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단순히 믿음이 거짓 공언하는 자들에게 어떤 행위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야 하는가? 바울은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나 행위로서 말하고 있다(딛 1:16 참조). 야고보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성령의 열매인 선한 행실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크게 공언하기는 하나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바이블 에코 1890년 8월 1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면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생애 가운데에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빌 2:13)기 때문이다.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