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기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믿음의 실제 II

 

 


A.T. 존스

 

   믿음의 말씀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지식은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할 어떤 필요성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 않고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아주 많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처음 신앙할 때에 모든 사람이 믿음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 남아있는 문제는 오직 믿음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미 받은 믿음을 기르지 않고서는 그 받은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을 기를 때에 믿음만큼 빨리 자라는 것이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이 더욱 자라고”라고 말씀한다(살후 1: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그 말씀하는 것을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을 기르는 것이 곧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이 선물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이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도록 시키는 자본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 자본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장사하고 기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이 자본은 이용할 때에 언제나 감소할 위험은 절대로 없다.  이것은 사용하는 만큼 늘어날 뿐이며 굉장히 잘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는 만큼 분명히 주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이 주어지며 영혼의 완전한 구원을 보장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10:9). 이와 같이 믿음 곧 믿음의 말씀이 바로 모든 사람의 입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일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 그들은 완전히 사단을 믿었다. 사단에게 완전히 굴복하여 사단의 완전한 포로가 되었다. 그 후 그들과 사단 간에는 완전한 연합과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고 이 연합을 부수고 이 평화를 깨뜨렸다. 그는 그의 말씀으로 이 일을 하시고 사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하나님만이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 사이에 혐오감을 넣어줄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 후에 그 본성이 악하게 되었고 그 후 사단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있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연합을 형성하였을 것이며 그들 간의 싸움 대신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계속 싸움만을 하였을 것이다.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본래부터 적의가 없었다. 둘 다 악하며 배도를 통해서 악하게 되었다. 악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항상 악이 선을 대적하며 연합을 이룬다.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한 인간은 친교를 맺는다. 타락한 천사들의 간교한 대장은 만일 악한 천사들처럼 인간을 끌어 들여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동맹하여 하늘에 반역하도록 인간을 끌어 들이는 그의 대리자들로 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사단을 혐오하는 능력이 없어진다. 지상에서 인간과 사단 간의 혐오감은 초자연적으로 넣어진다. 하나님의 개심시키는 능력이 날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역사하지 않는다면 신앙으로 키우는 마음이 없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보다 사단의 포로가 되기를 선택할 것이다. 하나님이 혐오감을 넣어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때에만 그 혐오감이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완전히 돌이키도록 하여 주의 편에 서게 한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각 사람의 마음 속에 넣어주는 사단에 대한 혐오감과 악에 대한 증오심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갈망하게 하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롬 7:14-25).

   이와 같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사단에 대한 적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구원을 요구하는 악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신 믿음의 선물이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이며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입과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말씀”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겠는가 하고 말하지 말며 누가 음부에 내려가거나 멀리 가서 믿음을 찾아 우리에게 가져다 주겠는가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신 30:11-14; 롬 10:6-8).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다른 모든 세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행사하자.

   “믿음을 행사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10일).

   말씀이 의(義)를 창조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는 일을 이루기를 기대함으로 의롭게 되는 의를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에 의하여 얻는 의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하는 능력이 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오직 말씀으로 성난 바다를 잔잔케 하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죄를 용서하셨다. 여기에서도 역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도다”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태초에 창조하실 때에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으며 땅에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신 이 같으신 분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의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롬 3:25).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워 만물을 존재하도록 하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만을 하시면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재창조가 되는 구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워 의의 말씀을 하시도록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의 말씀은 창조하실 때에 하신 말씀이나 구속하실 때에 하시는 말씀이 다 같은 말씀이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전에 모든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는 지금 모든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가 전혀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모든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를 창조할 말씀을 하시도록 하셨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도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모든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씀하신 후에 모든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말씀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을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애도 이와 똑같다. 인간의 생애에는 의가 없다. 인간은 그의 생애에 나타날 수 있는 의가 그에게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캄캄한 흑암같은 인간의 생애에 의가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의가 있게 되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의나 또는 의를 창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에게 없었지만 말씀을 받은 후에는 완전한 의와 그 의를 샘솟게 하는 원천이 바로 그에게 있게 되었다.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태초에 창조할 당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똑같이 그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도록 기대하고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의존할 때에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인간과 그의 생애에 의를 창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

   말씀 자체가 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의롭게 되었음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렇다. 주님을 찬양하라. 그러므로 이 복된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17일).

   아브라함의 믿음

   “성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을 얻는 것보다 휠씬 더 중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기대하는 것이며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믿음, 곧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무엇을 행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믿음의 일에 있어서 우리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은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80살이 넘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으나 아이가 없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5:5).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 말씀하신 일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사라는 그의 기대를 하나님의 말씀에만 두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창 16:2) 그 순간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에서 벗어져 나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끝까지 바라고 의존하는 대신 “사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아이가 태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사라에게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서 생긴 일을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거절하시고 한 아이가 태어난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여 버리셨다.

   그런 후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도록 할 것이며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후손과 언약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계속 말씀하셨다. 또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셨다. 왜냐하면 사래도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태어난 그 아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알고 이 문제에 주님의 관심을 끌려고 하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영케 할찌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15-21).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오직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라는 그의 계략은 단지 불화와 고통만을 가져오고 약속의 성취를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잡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이제 그 모든 계략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살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쨌든 이것은 말씀의 성취가 어느 때보다도 더 요원한 것같이 보였으나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고 보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무엇을 의존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완전히 그 말씀에 매달렸었다. 그들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버리고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시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에 의지하고 오직 말씀에 매달리고 완전히 그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이제 오직 말씀만이 역사할 길이 밝히 열렸으므로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약속하신 “자손”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력하지만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 11:11) “그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 이것은 믿음을 가르친 성경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기르는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의미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니라.”(갈 3:9)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거부하고 인간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가운데서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자들은 모두 믿음에 속한 자들이며 믿음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 복을 받을 자들이다. 오,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아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다. 누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모든 힘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겠는가!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24일).

   말씀만을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던 모든 불신의 계획을 완전히 청산하고 오직 믿음 위에 서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했을 때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노선과 참된 믿음에서 벗어났었지만 이제 오직 말씀과 참된 믿음으로 돌아왔었기 때문에 하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실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신뢰하여 이스마엘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아이 이삭을 얻었다. 그러나 아제 이삭을 얻었으나 이삭까지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만을 신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받았다. 이삭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자손이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 하나님은 그 말씀을 확증하시면서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21:12).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창 26:4).

   그러나 만일 이삭을 번제로 드려 불사른다면 그를 통해서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이 어떻게 될 것인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라는 약속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지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스마엘을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삭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면서 이삭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고 칭하리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가 아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알았을 때에 그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따랐으며 이런 말씀의 조화나 설명이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전에 내가 하나님의 약속에 간여하여 방해가 되었지만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만 돌아갔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주셨다. 그런데 이제 약속의 자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

   하나님이 처음에 기적으로 이삭을 주셨으므로 기적으로 그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번제로 바칠 때에 그는 죽을 것이다. 그 때에 그를 다시 돌려주실 수 있는 기적은 오직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하실 수 있으시므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삭을 다시 살리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하신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나의 몸과 사라의 몸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삭을 낳을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시므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제 그의 마음은 정하였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갔다. 사흘째 되던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4, 5). 누가 갈 것인가? “내가 아이와 함께 … 가서” 그러면 누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 “내가 아이와 함께 … 가서 …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간 것처럼 꼭 그와 함께 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이삭이 잿더미에서 살아나 함께 돌아갈 것을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자손이라 칭하리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자 했다(히 11:17-19).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약 2:23). 그러나 더 나아가서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다(롬 4:23-25).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이다. 그리고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깨닫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1월 31일).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