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의 참된 의미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의 경험은 오늘날 거듭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체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월절의 경험은 거듭남에 이르는데 필요불가결한 회개와 자복의 경험이 함축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유월절의 참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모든 죄인들이 한결같이 경험해야 하는 회개와 자복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 참된 의미였습니다.

   역사적인 이스라엘백성들의 실패는 유월절의 실상이 되는 회개와 자복은 없으면서 양만 잡으면 죄가 용서되는 것처럼 하나의 예식과 제사의식으로만 유월절이 준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듭남의 경험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는데 실패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실패의 경험은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대진리는 죄에 대한 진정한 슬픔과 생애의 변화가 없이도 다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변질되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값싼 구원론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선악의 싸움에서 하나님을 편들어 주기만 하면 기뻐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와 자복은 형식적이 되고 진정한 거듭남에 이르는데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날에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거듭나지 못한 자(편집자주)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생애에 죄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거듭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험에는 죄를 간직한 채,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선한 사업도 하며 교회의 녹명책에 이름을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역시 나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겠노라 입니다. 그것은 그 마음에 죄와 죄 된 생애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죄를 품고 있고 생애가 변화되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면 아직도 진정한 자복과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3:9; 5:4).

   진정한 거듭남의 생애는 세상을 이기고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회개와 자복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이 지킨 유월절의 예식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으로 우리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의 모든 절차와 규범들은 참된 회개와 자복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무교병의 실체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 먹되” (출 12:8).

유월절 밤에 하나님께서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월절에 유교병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교병은 또한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상징하는 떡입니다.

   참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영혼들은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데 그것은 죄 없는 예수님의 생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마음과 생애에서 죄를 제거해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과 생애에서 죄를 깨닫고 제거하는 일이 없이는 거듭남의 경험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진리는 바로 의와 죄가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며 거듭남의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무교병을 먹는 것 역시 깊은 뜻이 있었다. 이 절기 동안에는 그들의 집에 누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유월절의 규례 가운데 명백하게 지시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은 그것을 엄격히 지켜야만 했다. 그와 같이 죄의 누룩도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영양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 8)라고 편지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278).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무교병이 되신 것처럼 그분을 믿는 영혼들도 무교병이 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영혼들은 반드시 경험하여야 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유월절 저녁에 무교병을 먹도록 하셨고, 그 이후에는 무교절을 지키도록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시여, 참으로 우리들의 생애는 무교병이 되었습니까? 무교병을 먹는다는 말은 철저한 회개와 자백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알고 있는 죄가 있다면 무교병이 아니라 유교병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애는 거듭난 것이 아니며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쓴 나물의 실체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출 12: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는 유월절 저녁에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도록 하셨습니다. 누룩이 없이 구운 딱딱한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는 떡 맛을 한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결코 맛있는 음식이 아닐 것입니다. 왜 애굽을 떠나는 마지막 저녁에 하나님께서는 맛있게 음식을 준비하여 먹도록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은 죄의 쓴맛을 인생들이 이해하고 죄의 가증함과 고통을 깨닫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쓴 나물을 무교병과 함께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쓴 나물과 고기를 함께 먹어 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그 맛이 매우 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자복의 경험은 결코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 아니라 매우 쓴 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매우 쓴 것입니다. 숨겨진 죄를 회개하고 자복할 때에 어쩌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일도 감수하여야 하며 이웃에게 창피를 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아이들의 경우에는 매를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자복은 매우 쓴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쓴 나물과 함께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죄를 변명합니다. 그리고 변명과 구실로 일관하는 불완전한 회개와 자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쓴 나물을 먹지 않는 행위입니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구실을 붙여 죄의 쓴맛을 경감시키려고 한다면, 죄는 변명과 자기 합리화 가운데 죄의 가증함과 본질은 은폐되고 축소되어 죄의 쓴 맛을 통하여 얻어질 축복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행위는 쓴 나물을 먹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이런 회개와 자복은 불완전한 회개가 되어 그의 생애에서 죄 된 습관을 정복하는 일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에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죄 그 자체를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쓴 나물은 입에는 쓰나 속에서는 약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 형제와 형제 사이에 회개와 자복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상대의 잘못과 자신의 잘못을 비교하여 상대의 잘못이 자신의 잘못보다 크거나 비슷할 경우에는 별로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자복하더라도 형식적이거나 아니면 상대방 형제의 잘못을 말함으로 자신의 잘못을 은폐, 축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회개와 자복은 완전한 회개와 자복의 경험이 되지 못합니다.

   완전한 회개와 자복은 상대의 잘못이 99%이고 자신의 잘못이 1%라 할지라도 자신의 1%의 잘못을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상대 형제의 죄는 말하지 않고 자신이 지은 작은 죄만을 회개하고 자복한다면 자신은 물론 상대방 형제에게도 성령은 크게 역사하셔서 상대 형제를 회개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 죄를 생애에서 완전히 끝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은 단순히 그 죄의 형벌을 피하고 면죄받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서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회개와 자복의 목적은 그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마음을 치료받고 새 마음을 창조받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경험이 바로 이런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0).

   다윗의 회개 가운데는 자신의 죄를 변명하거나 죄의 결과를 경감시키려는 어떤 의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형벌의 면죄를 위하여 탄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그 자체를 슬퍼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죄의 용서뿐만이 아니라 타락한 자신의 마음이 정결케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의의 두루마기는 벗겨지고 성령님은 내어쫓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순결한 마음으로 재창조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깨끗한 양심으로 변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단순한 형벌의 면제를 위하여 기도드릴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기 전에는 기도의 밀실에서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를 떠났다면 시편 51편에서 우리가 어떤 경로를 따라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주께서 높고 명예로운 자리에 있는 이스라엘 왕에게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의 기별을 보내셨다. 다윗은 그의 죄를 자복하고 그의 마음을 겸비히 하였고, 하나님의 모든 처리는 모두 의롭다고 하였다(시 51:1-17 인용)(원고 147, 1903).” (화잇주석, 시 51:1-17).

   “다윗은 미몽에서 깨어나 그가 범한 죄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사울처럼 그의 행동을 변명하려 하거나 그의 죄에 핑계를 대려 하지 않고 후회하는 마음과 진실한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 다윗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정신을 보이지 않았다.” (화잇주석, 삼하 12:13).

   “그대는 죄 가운데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지체하지 말고 자비와 용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라. 다윗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자, 회개와 겸손으로 그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토로했다. 그는 그의 면류관은 잃어버려도 견딜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교회증언5권, 177).

   다윗은 무교병과 함께 쓴 나물을 먹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을 의탁하고 그 결과를 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쓴 나물을 먹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라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 먹되” (출 12:8).

   유월절의 어린양의 고기는 반드시 구워서 먹고 삶아서 먹거나 다른 방법으로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까다롭게 먹는 방법에 있어서까지 자세한 규칙을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음식을 요리할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을 가하여 조리를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요리사들은 가장 담백하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열을 가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불에 굽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반드시 구워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진리야 말로 죄인들에게는 가장 맛있고 고단백의 영양가 있는 음식이며 요리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나 구운 고기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가장 담백하고 맛있는 음식이 되겠지만, 유월절 양은 불꽃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여야 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가장 쉽게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혹독한 고통의 죽음을 당하여야 할 것에 대한 합당한 상징일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 밤에 구워먹은 어린양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합니다. 고기를 반드시 구워먹어야 하는 유월절의 실체는 우리들에게 가장 쉬운 방법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가르쳐주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영생을 얻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지는 고통은 바로 유월절 밤에 어린양이 불에 구워지면서 쓰며 나오는 물과 피였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고통과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아버지 한분 외에는 그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그분이 경험하신 사망의 고통이 무엇이며 얼마나 처절하게 죄와 투쟁 하셨는지를 인간들은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심으로 어떤 인간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셨다.” (시대의 소망, 694).

   “멸망하는 무수한 인간이 그분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그분은 피의 침례를 받아들이신다. 그분은 순결과 행복과 영광의 하늘 조정을 버리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즉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한 세계를 구원하려고 오셨다. 그분은 자기의 사명에서 돌아서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스스로 범죄한 인류의 화목 제물이 되실 것이다. 그분의 기도는 이제 복종하시겠다는 말씀뿐이다.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하신 후 잠시 일어나시던 몸은 죽은 듯이 땅에 쓰러졌다.’” (시대의 소망, 693).

   예수님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요 정신적인 것이었으며 모든 인류가 지은 죄의 무게를 느끼심으로 오는 고통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구워 먹어야할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주님의 심장이 파열되는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의 행위를 의존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장을 파열시킨 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죗 된 생애를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고 기뻐 날뛰는 축제예배와 같은 경거망동하는 일은 있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의 불 가운데서 악한 습관이 소멸됨

   주님께서는 죄 있는 인간의 육신을 취하심으로 죄 있는 육신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고난의 풀무에서 모두 소멸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육신이 연약함으로 이룰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품성을 계발 하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주님께서는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시고 죄 짓지 않은 생애의 모본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들도 믿음으로 죄 짓지 않는 온전함의 생애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우리들에게 가능할까요? 우리 주님의 모본을 따름으로서 입니다.‘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고난의 불을 통과하므로 육체 속에 있는 죄의 습관과 각종 정욕을 소멸 시킬 수 있으며 고난의 학교에서 인내를 배우는 자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을 불에 구워 먹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완전한 거듭남의 생애를 살기를 원하신다면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반드시 구워서 먹어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구미와 식성을 맞추기 위하여 삶아먹거나 먹기 쉬운 스프를 만들어먹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난의 풀무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순금에서 찌꺼기가 제거되는 것은 풀무의 열을 통해서이다. 예수께서는 그 시험을 주목하신다. 그분께서는 그것이 당신의 사랑의 광채를 반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품성의 귀금속을 정련하기 위하여 필요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고 엄격한 시험으로써 당신의 종들을 훈련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어떤 사람들을 보시고 이들을 시련에 처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그들의 품성을 시험하며, 그들 자신들은 알지 못했던 결점과 약점들을 드러내는 위치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분께서는 이 결점들을 시정하고 당신을 위한 봉사에 그들 자신을 적합한 자가 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 주신다.”(부조선지자 129, 130)

   “각 시대를 통하여 구주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시련의 학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아 왔다. 그들은 세상에서 좁은 길을 걸어가고, 고난의 풀무에서 정결함을 받았다.”(각 시대의 쟁투 649)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백성이 확고하고 진실한지 시험하고 모든 불의에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을 고난의 풀무 가운데서 연단하셨다.”(교회증언4권 18)

   “우리가 시련을 견디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실은 주 예수님께서 계발시키기를 바라시는 귀중한 무엇을 우리 속에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 속에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시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연단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가치 없는 돌을 당신의 용광로 속에 던져 넣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연단하시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다. 대장장이가 쇠와 강철을 불 속에 던져 넣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금속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사람들이 어떤 기질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적합한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그들이 고난의 풀무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치료봉사, 471).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5-7)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비하신 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허리에 띠를 뛰고 급히 먹으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

   유월절 어린양의 구운 고기는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음식을 먹을 때는 천천히 그리고 가장 편한자세로 꼭꼭 씹어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의 구운 고기는 지팡이를 잡고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은 채 급히 먹어야만 합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끝내고 이제 자유의 나라,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가기위해서는 급히 애굽을 벋어나야 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언제 또다시 마음이 변하여 그의 약속을 번복하고 강한 군사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붙잡을지 알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급히 유월절 양을 먹고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떤 진리를 상징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번은 예수님께서 한 젊은이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부친이 돌아 가셨다면 부친을 정성스레 장사지내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상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생각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너무나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만약 사랑하는 부친이 죽었다고 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이 모두 애굽을 출발할 때 홀로 애굽에 남아 아버지의 장사를 치른다고 가정하여 보십시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죽은자가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을 떠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떠나 생명으로 옮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명령이 내린다면 떠날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 신을 신은 채 급히 음식을 먹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시여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보다도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 순종하는 일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급히 먹어야 하는 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드리고 피 공로를 의지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즉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말씀을 즉시 순종할 마음의 자세가 없다면 거듭남과 승리의 생애를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순종할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칭의는 물론 성화의 단계에서 결코 승리의 생애가 불가능하며 성경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는 영적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을 즉시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도와 지지를 받기 위함이며 그분의 뜻을 알고 그것을 순종할 힘을 얻기 위함이다”(사인즈 1882. 9. 7)

   “진실로 성화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것이 그들에게 열려지자마자 즉시 순종하고 교리의 모든 점에 있어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나타낼 것이다. ”(가려뽑은기별3권, 20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성도들이시여 우리들은 허리에 띠를 뛰고 신발을 신고 말씀을 연구하며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생애를 살고 있습니까?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는지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들은 지금 유월절의 고기를 급히 먹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유월절 만찬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을 포기하라

   가나안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애굽(세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애굽과 가나안을 동시에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소망하는 자들은 애굽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을 떠날 때 어린양의 피 가없는 모든 곳에는 죽음과 곡성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들었으며 애굽의 부귀영화도 죽음 앞에는 모두가 허사임을 확인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한결같이 애굽(세상)을 버릴 수 있었고 포기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떤 진리를 우리들에게 깨닫게 합니까?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시여 참으로 세상을 포기 하셨는지요? 혹시 말로서만 믿음을 공언할 뿐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직 바로 왕 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며 죄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오래전에 침례를 받고 교회의 녹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며 자유인이 아닙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받은 침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역사의 거울은 애굽(세상)을 포기하고 고센 땅을 떠나 홍해로 나아온 자들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전 10:1-2)

   “침례는 아주 엄숙하게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앙 고백으로 자아는 죄된 생활에 대하여 죽는다.”(화잇주석, 롬 6:1-4).

   “그리스도는 침례를 그분의 영적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삼으셨다. 그분은 침례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따라야 할 결정적인 조건이 되게 하셨다.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 침례로써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였고, 하늘 왕의 자녀들이요, 하늘 왕의 한 가족들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모든 세상적 관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삼고 새로 맺은 관계를 첫째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자아 방종과 교만 가운데 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리스도는 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주를 위해 살아야 할 엄숙한 언약에 묶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 그리스도인 생활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는 초청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수침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유의하라.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도장을 치시고 그들은 그분의 자녀들임을 선언하신 것을 기억하라. 전지전능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분들과 진실된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받으신다. 그분들은 침례식이 있는 곳마다 임재하시고, 세상을 포기하고, 영혼의 전으로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수침자들을 가납하신다. 이 수침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원고 27 1/2, 1900).”

   세상(애굽)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채 침례를 받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충성스럽게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며 건강개혁을 하고 시골생활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진심으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들은 무익한 것입니다.

   몸은 애굽땅에서 나왔으나 마음으로 애굽은 포기하지 못하였던 이스라엘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60만 명의 장정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광야에서 죽은 역사는 말세를 살아가는 영적이스라엘백성들에게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애굽 땅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출 12:37).

   장정이 육십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렇게 소원하던 자유를 얻고 애굽에서 나왔으나 애굽을 떠나 온지 몇 일만에 그들은 애굽에서 떠나온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들은 몸은 비록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으로 애굽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떠나온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할 일은 애굽땅을 떠나온 육십만 장정들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들로 매우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간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대 이스라엘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일까요?

   애굽땅을 떠나온 사람은 가나안은 갈수 있으나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의 운명은 가나안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광야에서 죽는 것입니다. 결코 애굽으로 다시 되돌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면 몸은 이미 애굽(세상)땅에서 나온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 마음입니다. 진실로 세상을 포기하는 자들은 하늘 가나안에 들어 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결코 애굽의 고센땅(세상)으로 돌아가 갈수 없을 것은 침례를 받으므로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2-4).하였으나 한명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한 역사는 우리들에게 거울입니다.

   광야에서 죽을 운명이라면 무엇 때문에 애굽을 나왔어야 합니까? 광야보다는 애굽이 살기 좋은 곳이요 애굽에서 살았더라면 그렇게 한결같이 짧은 생애로 모두가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거울은 오늘날 영적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침례를 받은 영적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을 가기보다 세상으로 돌아가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이 완전한 불신자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은 참으로 심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상태를 생각할 때 슬픔으로 충만해 진다. … 교회는 그 지도자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서 돌아섰고 꾸준히 애굽을 향하여 퇴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결핍에 우려를 나타내거나 놀라는 자들은 별로 없다. 의심과, 심지어 하나님의 영의 증언들을 불신하는 일까지 도처에서 우리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단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교회증언5권, 217).

   지금 마지막 교회가 애굽을 향하여 돌아가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도 심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일을 교회가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에 장사지내도록 하였던 똑 같은 사단의 기만에 교회가 빠져있다는 말입니다.

   뜨뜻미지근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에서 망하게 하도록 하기위한 사단의 기만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의 최면술에 빠져있습니다. 뜨뜻미지근하게 살아가는 생애는 구원 얻기에 전혀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차가운 상태보다는 나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거의 구원에 가까운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은 광야에 있으나 마음은 애굽과 가나안두고 있는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가나안에 갈수 없으며 애굽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은 정반대 방향이므로 결과적으로 중간지역인 광야에서 모두 장사지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늘 진주를 항상 찾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의 좋지 못한 습관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저희 안에 사시게 하기 위하여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귀한 진주를 얻지 못한다. 그들은 불순(不純)한 야망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극기와 희생의 길을 걸으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들은 거의 하늘나라에 가까이 이른 것같이 보이나 그 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구원을 거의 얻었으나 온전히 얻지 못했다는 말은 거의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이다.”(실물교훈, 117).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4-16.

   뜨뜻미지근한 영적 상태가 어떤 것이기에 토하여 내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생각해보았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 ‘아멘 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신 후 첫 말씀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질책하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싫어하시는지를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 고백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 같으면, 그분께 훨씬 더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실한 추종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계속적인 짐이 된다.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악한 천사들은 그들을 크게 기뻐하고, 그들의 잘못된 길을 보고 하나님의 천사들을 비웃는다. 그들은 국내외에서 하나님의 사업에 저주가 된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교회증언1권, 188.

   “우리는 절반은 주님의 것이요, 절반은 세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그분의 백성이 아니다.”-교회증언 5권, 83.

   “어떤 사람도 중립적 위치에 설 수 없다.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의의 원수도 섬기지 않는 중간 계층은 없다. …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완전히 상이한 성격의 제안을 하는 다른 음성을 듣게 된다. 반 만인 봉사를 하게 될 때, 인간 대리자는 흑암의 군대의 훌륭한 동맹자로서 원수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산상보훈, 93-94.

   “우리는 그리스도의 협력자이든지 원수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모이든지 흩어지게 될 것이다. 결정적이요 완전히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정반대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리뷰 1883년 9월 4일.

   “반쪽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호하게 하고 경건을 오해하며 참된 경건을 이루는 요소에 대하여 거짓된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어떤 이들은 거짓 공언자들이 행하는 것처럼 육욕을 위해 살며 성향을 따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 그들은 정신과 행동으로 실제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 당신의 시대에는 우리 시대처럼 하나님과 돈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리뷰 1890년 8월 19일.

   “그분께서는 마음의 반쪽은 어떤 우상에게 바쳐지고 있는 때에 반쪽만의 경배를 가납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심령, 마음 전체를 요구하신다. 그대가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려서 다른 어떤 대상에게 집중시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목사에게 보내는 증언, 439.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은, 개인의 잘못을 책망하는 분명하고 솔직한 증언들에 대하여 언제나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정결케 하는 시대에,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완전히 회심하고 거룩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속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보응을 받게 되든지 할 것이다.” -교회증언1권, 288.

   뜨뜻미지근한 영적 상태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절반만 마음을 바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절반은 세상에 절반은 하늘에 둘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함께 우리의 마음에 계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나누인 마음에 들어오시지 않을 것이다. 만일 마음에 재물을 섬기기 위해 주어졌든지, 이기심과 교만으로 그 방을 채웠으면 하늘 손님을 위한 방이 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성전이 비워지고 정결하게 되기까지는 그분의 거처로 삼지 않으신다.” -우리의 높은 부르심 55.

   “나는 셋째 천사의 기별이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누룩처럼 작용하여, 그들의 교만과 이기심과 탐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거해 버려야 할 것을 보았다.” -교회증언 1권, 132).

   재림성도들이시여, 우리들은 애굽을 생각하므로 절반만의 마음을 바치는 미지근한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은, 그것은 곧 광야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은 애굽땅을 포기한 자들만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영혼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체험입니다.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