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누에의 한살이를 지켜 본적이 있는지요? 작은 애벌레인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란 후에는 자신의 몸에서 뽑아내는 가늘고 아름다운 실로써 집을 짓고 그 속에 들어가 한동안 깊은 잠을 잔 후에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나비로서의 일생을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누에가 자신의 집(고치)을 지을 때 나중에 자신이 나방이 되어 나올 때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문을 만들지 않는 실수를 합니다.

   그래서 나방으로 거듭 태어난 누에는 자신이 집밖으로 나가는 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질긴 실로 만든 자신의 집 한 모퉁이를 뚫어야하는 힘든 일을 하여야 합니다. 누에의 집은 생각보다 질기고 든든한 실로 만들어졌기에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뚫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방은 끈질긴 노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구멍을 내는 일을 합니다. 힘든 고역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드디어 나방은 자신의 집에 구멍을 뚫고 나오는 일에 성공합니다.

   순간 나방은 그동안의 고역과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날개를 치며 거듭 태어난 기쁨을 만끽합니다. 넓은 세상이 자신의 세상이듯 활개를 치며 이제는 과거의 징그러운 벌레가 아닌 아름다운 모습의 나방이 되어 여왕처럼 고고한 자태와 아름다움을 뽐내며 새로운 삶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누에의 일생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는 누에가 나방으로 변화되어 고치를 뚫고 나오는 힘든 과정을 안스럽게 여겨 가위로 고치의 한 부분을 잘라주어 나방이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경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나방은 힘들이지 아니하고 고치 안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 같아서는 이 나방은 힘들이지 않고 나왔으니 더욱 기쁘고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드시 경험해야 할 과정인 고통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은 나방은 고통과 시련을 통과한 나방의 힘찬 모습과는 달리 힘이 없고 무력한 나방이 되어 힘없이 날개를 떨어뜨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영혼들에게 실물교훈이 됩니다. 우리들은 분명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험해야 할 체험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체험이 없다면 마치 고통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고 세상에 나온 나방과 같이 되어 거듭남의 기쁨도,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생애에서 오는 희열도 없이 마치 바싹 마른 사막을 걸어가는 가련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세상도 잃어버리고 영생도 잃어버리는 가장 불쌍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혹시 뜨뜻미지근한 우리의 상태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닌지요? 이번 호에도 다시금 역사의 거울을 통하여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1-6).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유월절 - 칭의을 위한 필수적 경험들

   누에고치의 나방이 고치를 뚫고 거듭 태어나는 과정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듭남의 생애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실물교훈이라고 믿습니다. 두꺼운 고치를 뚫고나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이 밖으로 나온 누에나방이 나방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경험해야 할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요일 5:1)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그런데 왜 이와 같은 거듭남의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세상을 이기는 삶, 죄를 짓지 않는 삶을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서 보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그것은 거듭남에 수반되는 체험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두꺼운 고치를 뚫고 나오는 경험이 없이 밖으로 나온 누에고치의 나방은 나방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에 수반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유월절을 지킨 경험 속에서 참된 거듭남에서 수반되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5-11).

   1. 흠 없는 어린양을 잡으라

   2. 우슬초 묶음으로 어린양의 피를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3. 고기는 불에 구워 먹으라

   4.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5. 무교절을 지키라 (유교병을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6.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급히 먹으라

   7. 애급 땅에서 급히 나오라 (포기하라)

   이와 같은 일곱 항의 모세의 지시를 성실하게 지킨 이스라엘백성들의 유월절의 경험은 지금도 진정으로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영혼들에게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① 흠 없는 어린양을 잡으라

   이스라엘백성들이 흠 없고 점이 없는 어린양을 유월절 양으로 잡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는 죄의 흔적과 생각으로라도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표상이었습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참으로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흉악무도한 죄인들처럼 강도들과 함께 천하에 가장 큰 죄인으로 돌아가셔야 하였을까요? 그는 분명 이 세상에 가장 큰 죄인이 되어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렇습니다. 분명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사실 그분의 어깨에 메어진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고민하신 예수님의 고통과 고민은 바로 우리가 당할 죄로 말미암는 고통이요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얼마나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지요? 많은 사람들은 지식적으로는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말하지만 마음에는 아무런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그분의 고난을 열거하였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왜 죄가 없으신 그분이 그처럼 억울함을 당하시고도 한마디의 말씀도 하시지 않았을까요? 죄 없는 나를 왜 치는가? 라고 항의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많은 죄를 지었으나 채찍은커녕 아무런 조롱과 멸시와 욕을 먹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수치와 조롱을 못 느끼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이처럼 애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4-1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고통은 뼈가 어그러지는 고통이었고 아프지 않는 뼈가 없었으므로 모든 뼈를 셀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진 죄책감으로 그분의 마음은 초밀 같이 녹아서 물 같이 쏟아졌고 혀는 너무나 갈하여 이틀에 붙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을 위하여 고통을 참으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화잇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에 의하여 당하시는 처절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 하셨습니다.

   “조롱거리의 옷을 입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 서 계셨다. 허리까지 옷이 벗겨지고 등에는 길고 흉칙스러운 매 자국이 보였으며 그 곳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분의 얼굴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고 피로와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으나 지금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인 적은 전혀 없었다.” -시대의 소망, 735.

   “사형장에 도착해서 죄수들을 형틀에 묶었다. 두 강도는 그들을 십자가에 붙들어 매는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으나 예수께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 구주께서는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얼굴은 침착하고 평온했으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분의 얼굴에 맺히는 식은땀을 씻어 줄 동정어린 손길도 없었고 그분의 마음에 와 닿는 동정의 말이나 변함없는 충성의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 저들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만족히 여기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아무런 복수도 구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무지와 범죄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다만 그들을 용서해 주기를 탄원하셨는데 이는 저희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었다.” -시대의 소망, 743-744.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눌렀다. 불법으로 인하여 생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곧 그분의 무서운 진노가 당신의 아들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 그러나 이제 그분이 지신 죄의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그분은 화해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최대의 고민의 시간에 구주께로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이러한 고민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사단은 맹렬한 유혹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괴롭혔다. …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가 더 이상 탄원하지 않게 될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민을 느끼셨다. 그분이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속자인 그분에게 아버지의 진노가 쏟아지게 만든 죄에 대한 의식이었다.” -시대의 소망, 752-753.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이처럼 처절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이 말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를 인하여 이처럼 처절한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껴보셨습니까? 이 경험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신다면, 이 경험은 참으로 필요한 경험입니다. 지금 이 시간 십자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음과 같은 허락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이 모든 사랑의 역사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흠 없는 양을 잡아야하는 진정한 이유였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흠 없는 유월절양은 죽어야 하였습니다.

      ② 어린양의 피는 뿌려져야 함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6-7).

   유월절양은 반드시 모든 피를 쏟은 후 죽은 후 그 어린양의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져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린양이 흘린 피와 뿌려지는 피를 구별하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어린양이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으며 어린양이 피를 흘렸다 하더라도 그 피가 문 인방에 뿌려지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유월절 밤에 피가 뿌려지지 않는 집에는 구원을 보장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린양을 잡았다고 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인기 있는 기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고 거듭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 기별은 거짓 복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런 복음은 어린양을 잡기만 하면 되지 번거롭게 피를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지 않아도 된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을 믿고 있을는지 모르나 그 피가 그들의 이마와 손에 뿌려지지 않았기에 그들의 생애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이기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피를 뿌리라는 말씀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생애에 피가 발라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문 인방(머리)은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어린양의 피를 뿌린다면 분명 마음이 정결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것을 정결케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히 9:2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성도들이시여,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고계십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인류가 범죄함으로 모든 것이 부패되고 망가졌으나, 그중에도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고칠 수도 정결케 할 수도 없는 부패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부패된 마음을 무엇으로 정결하게 할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만이 우리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14).

   그렇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과 손에 뿌리기만 한다면, 그 피는 우리의 양심(마음과 정신)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행실(죄의 습관)로부터 깨끗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참 복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품성이 변화되지 않고 승리의 생애를 살지 못하는 것은 어린양을 잡기만 하였지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그리스도께서는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피를 흘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은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에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 피를 우리의 이마와 손과 발에 발라 생애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흘린 피가 나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까?

   유월절 밤 어린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에는 어린양을 잡지 않은 애굽 사람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하여 졌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확실한 복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거짓 복음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시여, 여러분의 집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는 피가 뿌려져 있는지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③ 우슬초 묶음으로 어린양의 피를 발랐는가?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출 12:22).

   옛날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우슬초 묵음을 이용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랐습니다. 이런 행위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이마(마음)와 양손에 보혈의 피를 뿌려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피를 바르도록 지시하셨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죄를 인해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죄인들의 경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영혼들은 의인으로서가 아닌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마음을 낮추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하나님은 사람이 회개한다고 해도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용서하시지 않으신다(원고 11, 1888).” (화잇주석, 약 4:10).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이 나의 죄 때문임을 믿고 겸손히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에 결심과 다짐을 하게 됩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심과 용서받은 그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없다면 죄의 생애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은 죄인들에게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후 그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여인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일편단심 주님만을 섬기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기쁨에 도취되어서인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중환자를 고쳐주신 후에도 똑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

   오늘날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참으로 용서받은 죄인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시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영혼을 죄로써 더럽히기보다는 빈곤과 비난과 고독 그리고 어떤 고난도 달게 받기로 선택하라. 수치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 ―교회증언 5권, 147.

   아직도 이와 같은 결심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직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에 있지만, 그 보혈을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는 일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생애의 변화는 보혈의 능력에 있지만,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은 우리들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이 살아간다면,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기란 불가능한 것이며 공언하는 믿음이 어떠하던지 상관없이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흘려진 어린양의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지지 않는 한 정결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뜨뜻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많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며 공언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많은 원인은 어린양의 피를 마음과 생애에 뿌리지 않은 연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한지를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사도 바울도 우리들이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믿음의 조상 중에는 말하기도 흉측 하고 부끄러운 죄를 지은 르우벤도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큰 결심을 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는 물론 품성이 변화되는 축복을 얻어 하늘 새 예루살렘도성의 열두 문 중 하나의 문이 르우벤의 이름으로 칭하여지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삿 5:15).

   이것이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야 하는 진정한 이유였습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시지 않으시렵니까?

      ④ 증언에 나타난 성공 사례

   야곱의 생애에서

   “야곱은 인내하고 결심하였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그의 경험은 끈질긴 기도의 능력을 증거한다. 우리가 힘있는 기도와 불굴의 신앙의 교훈을 배워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나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가장 큰 승리들은, 재능이나 교육이나 부나 인간의 호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열렬하고 번민하는 믿음이 능력의 강한 팔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도의 밀실에서 얻어진다.” (화잇주석, 창 32:24-32).

   엘리사의 생애에서

   “엘리사는 충성스럽게 자신의 일을 하면서 단 마음으로 기다렸다. 실제적인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정직하고 강한 결심을 다져나갔다. 그가 가정에서 그의 아버지와 협력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지도자 1898. 4. 14).” (화잇주석, 왕상 19:19-21).

   다니엘의 생애에서

   “다니엘과 그 동료들은 초기 생애에 받은 바른 훈련과 교육으로 큰 유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 유리한 점 하나만으로 그와 같은 인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 곧 그들의 장래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좌우될 때가 왔다. 그때 그들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훈에 충실하리라고 결심하였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들을 위대하게 한 기초가 되었다. 그분의 영이 모든 참된 목적과 모든 고상한 결심을 강화시켰다(음식 29).” (화잇주석, 욥 28:28).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이 내린 결단의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 생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래도 그들은 방탕한 바벨론 궁정 안에서 엄격한 절제의 곧은길을 지켜 나가기로 결심하였다(청년 지도자 1898. 8. 18).” (화잇주석, 단 1:8).

   “이 청년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성취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도 그들 속에서 행 하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일하고 계셨다. 여기에 성공의 조건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 대신 결심해 주거나 우리 대신 행동해 주겠다고 제안하시지 않으신다. 그의 은혜는 우리가 결심하고 행동하도록 우리 속에 역사하시고 결코 우리의 노력을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은 깨어 일어나서 협력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은 우리 속에 역사하신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애쓰시는 실제적 교훈이다(청년 지도자 1903. 8. 20).” (화잇주석, 단 1:17).

   “그대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대의 믿음을 고백할 때에 주는 그대에게 특별한 힘을 나누어 주신다. 주를 찬양하기로 결심하라. 확고한 결심을 하면 의지력은 강화되고 그대는 곧 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원고 116, 1902).” (화잇주석, 시 18:3).

      결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연단하고 개선할 결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판에 박은 듯한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그대의 능력을 잘 가꾸어서 사방에서 요구하는 인물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대는 그대가 열심 으로 행하는 일에 평가를 받을 것이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무릇 네 손이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원고 8, 1894).” (화잇주석, 막 12:30).

   “인간의 뜻과 방법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되게 하는 것은 가장 힘들고 혹독한 투쟁이며, 인간의 큰 결심과 결단을 요한다. … 품성은 그 결심과 행동의 성질을 결정할 것이다. 행동을 감정이나 경향성에 맞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알려져 있는 뜻에 맞출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고 복종하라(편지 135, 1898).” (화잇주석, 행 9:6).

      결심 자체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바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힘과 결심과 의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단순한 노력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비록 우리의 경험은 이 일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도움은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할 능력이 되시는 그분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맡기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을 붙들 때 그분이 그 일을 하신다. 신자는 단지 신뢰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할 때에 하나님이 일하시면 우리도 일할 수가 있다(원고 1a, 1890).” (화잇주석, 롬 12:2).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과거의 죄들을 회개하며 앞으로는 순종하기를 결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도 아울러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화, 89).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의 옳지 못한 습관이 그대로 굳어 버릴 수 있는 반면에, 저희의 능력을 잘 계발시킴으로 가장 고상한 봉사를 할 수 있는 재능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저희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어떤 곳, 어떤 장소에 있게 될 것이며 그들의 실력은 사람들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실물, 344).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사물뿐 아니라 세속적 사물에 있어서도 참된 일꾼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일을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굳은 결심으로 하셨다.” (실물, 348).

   “하나님께서는 표준을 높이 세우기로 결심한 자들만을 받으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대리자들에게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신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결코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악으로 기울려는 우리의 성벽에 맞추기 위하여 의의 표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품성의 불완전함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품성의 모든 의로운 특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특성을 가질 특권이 있다.” (실물, 330).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순결한 신앙은 의지와 관계가 있다. 의지는 사람의 본성 가운데 지배하는 능력으로서 다른 모든 능력을 지배한다. 의지는 취미나 성향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하는 힘으로서 사람의 자녀 중에 역사하여 하나님을 순종하게 하거나 혹은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 그대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무력하며 의혹에 붙잡히며, 또한 죄 된 옛 생애의 습관과 관습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에 때때로 낙담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정서가 그대들 자신에 대하여, 그대들의 가장 좋은 결심에 대하여, 또한 그대들의 가장 엄숙한 서약에 대하여 신실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진실되게 보이지 않는다. 그대들 자신의 부동성(浮動性)이 그대들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하는 자의 진실성까지 의심하게 한다. 그대들이 의심 가운데 헤매면 헤맬수록 모든 것이 더욱 거짓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대들을 위한 견고한 지반이 아무데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대들의 약속은 썩은 새끼줄 같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대들이 신뢰하여야 할 사람들의 말과 행위도 동일한 거짓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대들은 의지의 참 힘을 이해하기까지는 끊임없는 위험 중에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든 것을 믿고 약속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의 약속이나 믿음은 그대들이 그대들의 의지를 믿음과 행위의 편에 둘 때까지 그대들의 의지는 아무 가치도 없다. 만일 그대들이 그대들의 모든 의지력을 동원하여 믿음의 싸움을 싸운다면 승리할 것이다. 그대들의 생각과, 그대들의 인상(印象)과, 그대들의 감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니 그 이유는 그것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더욱이 그대들의 타락된 관념과 합하게 될 때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대들이 약속을 어긴 것과 맹세한 것을 이행치 못해 온 것을 깨달을 때에 그것이 그대들 자신에 대한 그대들의 신임과 타인에 대한 신임을 잃게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실망할 필요가 없다. 비록 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헛되고 거짓으로 보일지라도 그대들은 믿기로 굳게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들을 이러한 좋지 못한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라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대들은 하나님과 형제들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은 그대들의 의무이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의지를 취하시고 당신의 기쁜 뜻에 따라 의지를 작용케 하고, 또 행하도록 그대들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 때에 그대들의 전본성이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 하에 있게 되고, 또한 그대들의 사상까지도 그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충동과 정서를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는 없으나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지배할 수는 있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생애에 전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대들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써 그대들의 생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바 되며 또한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뛰어난 힘과 연합하게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을 당신의 강한 능력으로 붙드실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을 것이며 새로운 빛, 곧 산 믿음의 새로운 빛이 그대들에게 허락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와 협력해야 하며 사단이 끊임없이 그대들을 유혹하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이용하는 친구들의 뜻에는 협력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체 없이 그대들은 자신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두지 않겠는가? “나는 나의 의지를 예수께 바치되 지금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 순간으로부터 온전히 주의 편에 서지 않겠는가? 식욕과 정욕의 강력한 요구와 관습을 무시하라. 사단에게 “너는 곤고한 위선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말라. 사단이 이와 같이 그대들을 비난하고 낙담시키지 못하도록 문을 닫으라. “나는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심을 참으로 믿는다”고 말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하나님 안에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의지를 굳게 하나님 편에 둘 때 모든 정서는 예수의 뜻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대들은 그대들의 발이 견고한 반석 위에 놓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때때로 그렇게 하는 데는 그대들의 모든 의지력을 남김없이 투입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주조 과정을 끝내고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나올 것이다.” (청년, 151-153).

   “많은 사람들이 무서운 유혹의 힘, 곧 방종으로 빠져 들어가는 욕망의 힘을 깨닫고서 절망 중에 “나는 악을 저항할 수 없다”고 부르짖는다. 그에게 악을 저항할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라. 그는 거듭거듭 정복당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그는 죄악 생활의 습관에 지배된 나머지 도덕적 능력이 약하다. 그의 약속과 결심은 마치 썩은 새끼와 같다. 그가 약속을 깨뜨리고 서약을 어긴 것을 알므로 그는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아 주시거나 그와 함께 역사하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어떤 유전과 후천적 습관과 기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보다 낮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보다 오히려 모든 식욕과 정욕을 지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한한 힘으로 악과 싸우도록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우리의 선천적 혹은 후천적 성격이 아무리 그릇되게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고자 마련해 주신 능력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다.” (절제, 111-112).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시여,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유월절 어린양은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지기 위하여 이처럼 피를 흘리셨습니다.

   거듭남의 생애를 원하신다면, 다시 한번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여러분의 아름다운 결심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결심 자체는 썩은 새끼줄 같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자들과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남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