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9).

      유혹과 범죄

   사단은 많은 경우에 이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가지고 영혼들을 함정에 빠뜨리는데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거듭난 자들은 결코 실수할 수 없다는 완전론자들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반면에 진정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믿음으로 노력하는 거듭난 영혼들이 실수하고 연약하여졌을 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단은 연약하고 실수하는 영혼들을 자신의 권세아래 묶어두기 위하여 마음으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유혹과 범죄하는 것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말씀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유혹을 당하는 것과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들이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믿음을 지키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새롭게 거듭나고 재창조되는 것은 육체가 아닌 마음입니다. 지난 호를 통하여 연구한 바와 같이 거듭난 것은 마음이지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는 육체를 통하여 거듭난 마음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례로 삼아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고 확대해석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육체는 어떤 상황에 이르면 음욕을 품거나 행동으로 옮기도록 마음에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아직 범죄한 것이 아니요 거듭나지 못한 육체로 말미암아 마음이 유혹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범죄는 마음(의지)의 동의가 있을 때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요구에 의하여 의지(마음)가 굴복하고 육체의 유혹을 용납하여 음욕을 마음에 품으면 비록 행위로 범죄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비로소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음(의지)이 거듭나지 못한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여 어떤 여인에 대하여 악한 생각을 계획하면 이것은 악(음욕)을 품는 것이요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육체에 의하여 악한 생각이 발생되어 강력한 유혹을 받는 경우에 아직 의지(마음)가 굴복하지 않고 악한 유혹을 물리치기위하여 양심이 싸우고 있고 의지(마음)가 양심의 호소에 동의하여 육체의 악한 생각을 거절하기로 선택한다면 비록 악한 생각이 마음에 발생하였다고 할지라도 범죄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어떤 상황에서 거듭나지 못한 육체를 이용하여 여인을 보고 음욕(생각)을 마음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때에 거듭난 영혼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 거듭난 영혼의 선한 양심은 이 강력한 유혹과 맞서 싸울 것이며 의지(마음)는 즉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면서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머리를 흔들고 육체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드디어 결정을 내립니다. 그 투쟁이 비록 오랜 시간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범죄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유혹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여 유혹에 이겼다 할지라도 심령에 받는 고통과 괴로움은 대단한 것입니다. 거듭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유혹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다만 유혹에 빠질 뻔 했던 위기를 경험하였기에 마음이 심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이 가져다준 유혹이 성공하지 못하자 영혼의 무지를 이용하여 유혹을 받은 악한 생각 자체를 이미 죄를 지은 것처럼 죄책감을 갖도록 하여 유혹에서 승리한 영혼의 기쁨을 훔쳐가 버립니다.

   이런 경우에 영혼은 승리의 기쁨을 무지로 인하여 사단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유혹의 고통은 배가 되고 신앙생활이 메마른 사막을 걸어가는 고달픈 여행이 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유혹을 받고 실망할 때, 사단은 또 다른 기만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결코 죄를 짓지 않고는 살수 없다는 불신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많은 영혼들이 이 기만에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록 고통스럽고 힘이 들고 어려운 신앙생활 속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삶이 윤택하여지지 않겠습니까? 유혹을 당하였으나 죄를 짓지 않고 유혹을 물리쳤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순간 감사와 기쁨은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고 내일을 위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유혹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진 우리 인생들은 이런 시험과 유혹에서 면제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타락하고 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그리고 사단이 살아있는 동안은 피 할 수 없습니다.

   “사단이 통치하는 한 우리에게는 복종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할 얽매이게 하는 죄악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계속하는 한 멈추는 데가 없을 것이며, 우리가 도달해서 내가 완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없을 것이다.” (행적, 560).

   성도들이시여, 우리는 지식이 부족하므로 고통을 갑절이나 당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다면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심히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능자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왜냐하면 이런 경우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도리어 유혹에서 승리한 것이며 사단을 이긴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욕심이 잉태할 때(품을 때)에만 죄가 되고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유혹을 강하게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거뜬히 이기시고 승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뜬히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에서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우리들처럼 소위 여인에 대한 음욕을 일으키는 유혹을 당하셨을까 하고 의문을 제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보통 남성과는 달리 정욕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렇다면 분명 그분은 우리들의 육체와는 다른 인성을 가지신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분의 인성에 정욕을 소유하셨다고 말한다면, 마치 예수님도 우리들처럼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에서 큰 유혹이 되셨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생애의 거룩하심에 마치 오점이라도 남기는 듯하여 선뜻 자신있게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에게 육신의 정욕에 대한 유혹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들이 대답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어떤 말씀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소유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은 남성으로서의 가장 완전한 육체를 소유하신 분이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한 건강을 소유하신 분이시라는데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은 모든 면으로 완전한 제물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욕으로 인한 유혹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실례를 들면, 저는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초신자 형제들에게는 강력한 유혹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저와 그 형제가 다른 인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담배를 피우도록 하는 유혹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믿음과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육체의 정욕 따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과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일으키는 마음의 시험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우리도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가끔씩은 우리들도 성령의 충만한 경험 속에 있을 때에 육신의 정욕 따위는 별 유혹이 되지 않는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육신의 정욕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어렵고 힘든 유혹들이 있었고 그 유혹의 힘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광야에서 세 번의 시험을 이기신 후 그는 기절하여 쓰러지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과 함께 피가 흐르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심적인 고뇌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였는지를 증명하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이처럼 유혹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까요? 유혹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마음에 고통과 고민이 없었다면 이마에 땀과 함께 피가 흘러나왔겠습니까? 어떤 죄이든지 유혹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범죄에 이르지는 않는 것입니다.

      유혹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먼저 유혹은 어떻게 이르러 오는가? 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단은 타락한 육체, 곧 연약한 육체를 이용하여 우리의 생각에 유혹을 가져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2-15).

   육체의 욕심에 의하여 유혹은 이르러 옵니다. 어떤 욕심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요일 2:16).

   먹고 싶고,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냄새 맡고 싶고, 가져보고 싶은 욕심들은 모두 육체에서 나오는 것들이며 명예와 자랑들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타락한 육체는 이런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거듭날 때에 육체는 세포 하나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나오는 이런 욕심들은 우리 마음의 의지의 결정이 없이는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을 수 없으며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가 되는 것은 의지가 마음과 행동에 그 욕심을 허용하도록 명령을 내릴 때 그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라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유혹이 왔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첫째,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둘째, 피할 길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이르러오는 시험을 당신께서 허락하시기 전에 모든 시련들을 재어 보시고 달아 보신다.” (우리의 높은 부르심 323).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유혹을 받았을 때에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시험을 피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피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십시오.

   둘째 : 그 후에 담대히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 할 때에 오늘 일이 아닌 장래의 일을 가지고 우리를 시험하는 일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자녀 문제 등 모두는 장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들을 미리 앞당겨와 우리를 위협합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별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년이나 한달을 한꺼번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7).

   “매일 아침, 그 날 하루를 위하여 그대들 자신과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라. 몇 개월이나 몇 년을 위하여서 계획하지 말 것이다. 이것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만이 그대의 것이다.” (3보감, 93).

   그리고는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복하십시오. 그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담대하게 사단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십시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단이 피하여 도망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권세인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며 유혹으로 말미암아 상한 심령은 성령의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를 피하는 방법이며 유혹과 시련을 당한 영혼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0-11).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피할 길을 얻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복하지 않는 생애를 살면서 마귀를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단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사단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 주인(사단)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은 주인으로부터 무참하게 형벌을 받거나 구타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수많은 명목상의 교인들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단의 종이 되어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 순복하며 경건한 생애를 살고자하는 자들은 시험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벧후 2:9).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을 직면할 때에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마귀를 대적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굴복하든지 아니면 사단에게 굴복하든지 어느 누구에게 굴복하든지 굴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왕 누구에겐가 굴복하면서 살아가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단에게 굴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까? 사단의 종이 되어 사단에게 굴복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굴복하면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혹이 왔을 때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는 바로 처음부터 죄를 피해야 한다. 모든 감정과 욕망은 이성과 양심에 굴복되어야 한다. 모든 부정한 사상은 즉시 배척되어야 한다. 그대의 밀실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되라. 믿음으로 기도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라. 사단은 그대의 발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주시하고 있다. 그대가 그의 간계를 피하고자 하면 그대는 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믿음과 기도로써 복음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도 강제로 범죄 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의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한다. 정욕이 이성을 지배하고 불의가 양심을 이기기 전에 심령은 범죄의 행동을 의도해야 한다. 유혹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벧전 3:12). 시험받는 영혼이여, 주님께 부르짖으라. 속절없고 무가치한 그대로 그대 자신을 예수님께 던져 버리라. 그리고 바로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라. 주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육신적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시험을 받을 때마다 도와주실 것이다.” (5증언, 177).

   유혹을 피하라.

   감정, 욕망, 이성을 양심에 굴복시키라.

   부정한 생각을 즉시 배척하라.

   기도하라.

   이것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유혹에서의 승리도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거듭남이 없는 선한 행위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한 것이요 의롭게 살아보려는 노력도 헛된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거듭나야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우리의 선행도 노력도 가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태어남이 없이는 자라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이제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가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한 거듭남의 모델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느니라” (고전 10:1, 2, 10, 11).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모델을 성경 역사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데 곧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거듭남의 경험을 하였는지 아니면 올바르게 경험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거울입니다. 특히 말세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1).

   우리들은 앞으로 이 신비한 역사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역사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며 구원에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동일한 운명

   먼저 이스라엘백성들의 역사가 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거듭남의 거울이 되는지를 그들의 역사의 배경을 연구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존귀하고 명예로운 조상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요셉과 같은 성경에서 가장 존귀한 분들로서 믿음과 아름다운 품성을 소유하였던 분들을 조상으로 가진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8절로 10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5:2 참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바로는 이스라엘민족들의 번성함을 보고 시기하여 무력과 권세로 이들을 노예로 삼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억울하게 모두는 노예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인류의 모습을 비쳐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사단의 노예요 죄의 종들이 되어버린 모든 인류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운명과 동일합니다.

   왜 우리 인류가 죄의 종이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류가 처음부터 죄의 종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왕은 곧 사단을 상징합니다. 사단은 요셉(예수)을 알지 않기로 한 세상(애굽)의 왕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여 하늘에서 반역한 사단에 의하여 인류는 죄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애굽나라(세상)에 노예가 되고만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모든 인류가 사단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애굽나라의 노예 신분은 자신의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도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또 가장 희망이 없고 절망적인 것은 애굽나라의 법률에는 노예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하는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6절과 22절을 보면 바로왕은 애굽사람 모든 신민들에게 이스라엘 여인이 남자아기를 낳으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의 장래는 절망이요 희망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멸망이 예고된 속절없는 민족이었습니다.

v사랑하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 아들이 어머니의 목전에서 죽음을 당하는 부모들의 슬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 독립국가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들을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며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입니까?

   당시의 애굽나라는 지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요 이 나라를 대적할 나라는 지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이 해방을 기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이스라엘백성 가운데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경건한 믿음을 가진 한 가정에서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출 2:1-2).

      왜 구원이 필요한가?

   이스라엘백성들의 운명과 모든 인류들의 운명은 속절없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단의 노예로 태어났고 죄의 종으로 태어났기에 일생을 죄의 종노릇하다가 결국은 이스라엘민족들의 운명처럼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와 여인들의 절규가 들릴 때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절망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이처럼 항상 죽음의 공포아래 살았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은 그들에게 낙원이었고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삶이 비록 고생이 되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하는 고약한 법률만 애굽에 없었더라면 애굽의 종살이에서 적응하고 살았을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인생들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비록 고생이 많고 힘이 들지만 죽음이 없다면 구원받아야할 확실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망이 없다면 말입니다. 인생들에게 죽음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인생들이 죽음이 무서워 일평생 죄를 짓고 마귀의 종노릇하며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죄를 짓고 마귀의 종노릇하였지만 결국은 죽는 것이 인류의 운명입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4-15).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은 모든 인류는 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며“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은 모두가 사망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얼마나 우리 인생들은 절망적인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사망은 모든 인류의 원수입니다. 죽음이 인생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그 원한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죽음에서 부활한 의인들의 첫 외침을 들어보면 알게 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5-57).

   사망은, 우리가 먹지 않고 입지 않고 고생하여 모은 재산, 밤잠을 자지 않고 쌓은 지식, 온갖 고생과 노력으로 쌓은 명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획득한 권세, 꽃보다도 아름다운 이팔청춘의 젊음, 죽고 살지 못하는 부부의 애정,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들의 혈연관계 등 이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가져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말씀하시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인생들을 죽음에서 구원할 것이며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며 사단의 권세에서 우리들을 구원할 것입니까?

      인류의 소망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 인류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우리의 희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왕 바로(사단)를 찾아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 5:1)고 했을 때 애굽왕 바로가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거절하였습니다. 애굽왕 바로(사단)는 어떤 이유로도 이스라엘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착한 일을 많이 행한다고 바로가 자유를 주겠습니까? 아니면 법을 잘 지킨다고 자유를 주겠습니까? 아니면 고행을 행하고 순례생활을 한다고 자유를 주겠습니까?

   바로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어떤 선행에도 감동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어떤 고통을 당하여도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방종교의 허구성이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천주교, 불교, 회교, 유교 기타 모든 우상 종교들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고행과 선을 행하면 극락을 가고 연옥을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 해버리고 마치 구원이 믿음과 선한 행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세상에 편만 합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시여!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하십시다. 모두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 진리의 중요성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으며 상식적인 지식으로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은 증언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공로를 둘 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위험이 생긴다. 그대가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는 선물로 받아들일 때 그대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값없이 의로워진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것은 지각을 주신 하나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제일 먼저 마음을 끌어주신 하나님께 즐겨 헌신하고 봉사하도록 마음을 묶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이다. 믿음은 지적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고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를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삼는 것이다.” (믿음, 25).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하는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카톨릭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품삯처럼,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채무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선한 행위 중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구원은 오로지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받은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완전히 값없는 선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선한 행실과 타락한 인간의 공로로는 자신을 영생으로 이끌 수 없다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이 모든 논쟁은 끝이 난다.” (믿음, 19).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 속죄를 이생과 내생의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이다. 모든 믿는 영혼은 자신의 뜻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고 회개와 뉘우침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구속자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나타내어 능력에서 능력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전진해야 한다.” (믿음, 103).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속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흉악한 범죄자가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그리고 영생의 강한 소망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믿음, 104).

   인간의 마음인 믿음 그 자체는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고 우리의 선행도 역시구원을 얻는 되는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구원은 그리스도의 속죄(피흘리심)하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을 붙잡는 방편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가장 쉽게 구원을 얻도록 제공하신 방법일 뿐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붙잡는 도구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끔직한 죄를 버리지 않은 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론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마치 구원의 공로가 자신의 믿음에 있는 것 같이 믿음, 믿음을 부르짖고 있어요.

   죄의 생애는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전심을 그리스도에게 바치지 않으면서도 믿으면 구원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처럼 값싼 구원론을 제창하는 소리가 이 세상에 편만합니다. 죄의 종이 되어버린 인간들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방편이 아니고서는 달리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믿음은 구세주가 아니며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과 회개, 자백 등 모든 것은 구원의 은혜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은혜의 방법일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히 11:1)―믿음이 우리를 위하여 일해서 얻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선물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삼음으로써 받을 수 있고, 간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선물을 거절할 수도 있고, 의문을 제기하고 불신을 품음으로써 불행하게 될 수도 있다. (사인즈 1898. 5. 19). ” (화잇주석, 롬 12:3).

      또 다른 위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신 공로의 중요성을 간과해버리고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믿음이 아닌 자칫 행위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또 다른 위험이 영혼들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이기 위하여 가인은 자신이 농사지은 첫 열매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시도하였던 가인의 제사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교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이방 종교가 그렇고 모든 오류들이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하므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상은 온 세상에 편만합니다(우리의 사상과 대화 속에도 그런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구원의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믿음에 공로를 두는 위험과 함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단의 기만은 양대 산맥을 이루어 영혼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그대의 모든 선한 행위가 그대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선한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희생이 그대의 영원한 이득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78년 3월 21일자.” (3기별, 147).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좋은 자질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부조, 717).

   “선한 행위로 결코 구원을 살 수 없지만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고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영원한 상급은 우리의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행하여진 행위에 비례될 것이다.” (소망, 314).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행함의 공로로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우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고 완전한 신뢰로 바라볼 때 자아는 매우 작아지고 예수님은 매우 크게 될 것이다. 영혼과 육신이 죄로 얼룩지고 더럽혀져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스스로의 제한된 힘으로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의 어떤 부분을 담당해 주실 것이므로 그들이 나머지 부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실과 영원을 위한 유일한 소망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믿음, 25).

      유월절을 지키라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출 12:2-3).

   애굽왕 바로는 순순히 이스라엘을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왕은 애굽 전역을 황폐하게 하는 각종 재앙들, 개구리 재앙과 우박 재앙과 메뚜기 재앙과 암흑 재앙 등 무서운 재앙에서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절망적인 일은 이미 이스라엘백성도 종노릇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고기가마 곁에서 얻어먹는 고기국물 맛에 탐닉되어 애굽을 떠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오늘날 많은 영적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을 갈망하기는 하나 구원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결여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의 재미도 만만치 않고 타락한 식욕을 만족시키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고 죄의 종노릇하는 일도 습관이 되어 노예생활도 이제는 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소망 없이 죽는 것을 보지만 별 감정과 느낌이 없습니다. 이처럼 많은 영적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보내줄 리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가정에서 어린양이 피를 흘리며 죽고 애굽백성들의 장자가 죽기 전에는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결코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모든 백성들의 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죄 값을 갚았기 때문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구원의 근원은 어린양의 피흘림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율법 순종.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선한 행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인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고난과 시련을 견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회개와 자복.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는 이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리심만이 우리들은 사단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질문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출애굽과 동시에 바로의 속박에서 실제적인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홍해를 건넌 후 바로의 권세가 미치지 않은 광야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춤을 추며 자유를 만끽하는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는 아직도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경험이 없고 죄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죄에서 구원받은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영혼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언이야 어떠하든지 아직도 그 영혼은 사단의 노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영혼들은 세상(애굽)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자유를 누려야 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난 영혼들의 영적 삶인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8-9).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갈 5:1).

   세상(애굽)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생애를 살지 못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믿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요 아직도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있든 날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출 12:31, 32).

   유월절 밤을 지낸 바로 왕과 애굽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포로로 붙들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바로 왕은 자신보다 월등한 권세자가 계심을 깨닫게 되었고 더 이상 이스라엘을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왕은 지금까지 많은 재앙 중에서도 마음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월 14일 해질 무렵 한 마리의 어린양이 피를 흘리고 죽었을 때 바로왕은 모세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보좌에 앉은 왕으로부터 가장 비천한 종에 이르기까지 애굽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하였고 그들의 장자들은 죽었다. 그때에 애굽 전역에 큰 호곡이 있었다. 그때에야 바로는 거만스럽게 내뱉었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를 기억하였다. 그는 마음을 낮추고 모사들과 방백들과 함께 급히 고센 땅으로 가서 모세와 아론 앞에 부복하여 ‘가서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였다. 그들의 요구대로 필요하다면 양떼들과 소떼들도 같이 가라고 하였다. 만일 재앙이 좀 더 계속하면 그들 모두가 다 죽은 사람같이 될까 봐 속히 떠나라고 간청하였다. (3영적 246).” (화잇주석, 출 12:31, 32).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의 권세가 바로왕의 권세를(죄와 사망의 권세) 꺾으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역사의 거울입니까?

   아담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하여 최초로 어린양이 피를 흘린 이후 수많은 어린양이 피를 흘린 것과 정월 14일 유월절 저녁때에 피를 흘리고 죽어간 어린양은 인류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신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고전 5:7)하실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사단의 노예로 있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류의 죄 값은 치러졌고 사단의 권세는 깨어졌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사 49:25).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파멸시키시는 분으로서 또한 사단의 세력에 묶인 포로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따를 수 있고 사단의 시험들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생애를 당신 자신의 생애 가운데 한 모본으로 남겨 놓으시기 원하셨다.” (1기별, 271).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십자가상에서 외치시자 강한 지진이 있었으며 그 때에 진실하고 충성된 분들의 많은 무덤들이 열렸는데 저들은 모든 악한 일에 대하여 바른 증언을 하고 만군의 여호와를 크게 높인 분들이었다. 생명의 시여자로서 ‘나는 부활이요’(요 11:25)라고 선포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무덤에서 잠자는 이 성도들을 부르셨다. 저들은 살아 있을 때에 과감하게 진리를 증거한 사람들이었으며 저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주님에 대한 증인들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이상 저들은 사단의 포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1기별, 304).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린양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구원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를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입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오직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구속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대속하셨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굴복시켰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한들 누가 막을 것이며 죄에서 자유를 누린다 할지라도 누가 정죄할 것입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1, 33).

   왜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것이며 세상에 종노릇하며 살아야 합니까? 왜 또 다시 바로 왕(사단)을 섬기며 그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5:4-5, 3:9)라는 간증을 우리는 왜 하지 못할 것입니까?

   사단은 더 이상 우리들을 구속할 권세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들의 왕이 아닙니다. 바로왕은 모세에게 굴복하여 말하기를,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출 12:31-3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의 기쁨과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이것을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까? 분명 자유가 주어졌고 죄에서 구원이 허락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가 그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재림성도들이시여, 죄에서 자유를 누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그리고 또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6-7).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