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요일 5:1) 성경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고 하셨으며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은 거듭남의 진리를 이렇게 쉽고 간단명료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분명 이 말씀은 진리 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들은 칭의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드리는 영혼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반드시 체험해야할 몇 가지의 계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단계를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리 믿는다고 공언 할지라도 의롭다는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며 완전한 거듭남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기 위해서는 심령에는 알고 있는 죄가 하나도 없는 회개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알고 있는 죄가 하나라도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고 하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죄가 있는데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며 그리스도는 죄와 협력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공존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의 와 죄는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알고 있는 죄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결코 거듭남이 있을 수 없으며 칭의가 이루어질 수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소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1-22)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부자법관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들을 버리고 따라가야 합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모든 재산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집, 논과 밭, 짐승들, 심지어 우리들의 재능 시간, 자녀들, 생명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요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관리인일 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우리들의 소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자라”(롬 1:29-31)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유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의 소유란 죄악밖에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면 결단코 칭의를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시여 우리의 마음에 회개하지 않고 알고 있는 죄를 숨겨두고 있다면 결코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분노와 악의가 마음을 주관하고 있고 습관적인 죄를 용납하여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찌 알고 있는 죄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짓말 하시는 분이 신가요? 그럴 수 없는 것은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히 6:18)분이 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기 있는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는 의의 두루마기로 덮어주시고 칭의를 얻는다는 기별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에 대하여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며 오직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채워주셔서 구원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불순종 한다고 하여 버리지 않는 것처럼 한번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와의 관계만 깨트리지 않고 유지하면 부모의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이 믿음의 관계만 깨트리지 않고 있으면 영생의 유업을 주신다고 가르치는 복음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칭의 의 경험일까요?

    과연 알고 있는 죄를 완전히 회개하는 일이 없이, 죄를 미워하여 진심으로 죄를 자복하고 고백하는 일이 없이, 다시는 가증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심도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이라는 마음의 각오와 헌신도 없는 사람에게 의롭다는 선고가 주어질 것입니까?

    정로의 계단은 칭의 의 계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회개, 자복, 헌신, 믿음과 받으심을 확신하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없는 칭의 와 거듭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하더라도 거듭난 것이 아니며 칭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금과 철저한 건강개혁을 한다 할지라도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직분이 목사, 장노, 집사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니고데모처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결단코 하늘을 볼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칭의에 이르는 정로의 계단을 경험함이 없이 진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교인이 되고 있으며 교회의 신조와 원칙을 동의하는 서약만으로 신자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니 거듭나고 칭의를 얻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영혼들이 추측하는 믿음 가운데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나 실상은 아직도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그 영혼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심령에 호소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십자가 앞으로 로 이끌림을 받고 있을 뿐 칭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하는 은혜를 얻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 자신이 지은 죄를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마치 외아들을 잃은 과부와 같이 장자를 잃은 자가 통곡을 하듯 회개와 자복을 경험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십자가 앞에서 이런 경험을 체험하지 않은 영혼들은 비록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있다고 공언할지 모르나 사단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항상 시험이 오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죄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라

    진정한 칭의의 경험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영혼들, 선천적 후천적인 성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죄의 속박에서 벋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사단의 종이 되어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자들에게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대는 자기 의의 옷을 입고 죄악의 모든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치료제가 못된다. 그대는 참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대의 옛 사람이 죽지 않았다. 그대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하나님의 깨끗게 하시는 능력은 없다.”(2증언, 322)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복음의 축복과 특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품성의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그분에 대한 믿음도 나타내지 않았다. 저희는 악을 행하고자 하는 선천적, 또는 후천적 성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이 꽤 선하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대신에 저희 자신의 공로를 의뢰한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들로써 잔치에는 왔으나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는 입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인간 도덕가에 불과하다.”(실물, 315)

    칭의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과 칭의에 따르는 경험이 없다면 성화와 온전함에 이르는 진리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가지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생애를 사는 일과 완전함에 이르기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처럼 많은 종류의 복음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칭의에 따르는 경험이 없거나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것도 교인들의 대다수가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을 하지 못한 연고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칭의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완전한 의를 얻는 것이며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흠과 점이 없는 의인으로 서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을 얻기 위해 죄인들이 경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여 심령을 비우는 일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으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조건으로 우리를 위한 대치물과 담보로서 이 희생을 받아들이셨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분의 공로를 붙잡고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전가(轉嫁)되었다. 그 죄인은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며 하늘 임금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유업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1기별, 215)

    “용서와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믿는 자는 사단과 죄악의 자녀인 반역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백성의 위치로 나아오게 되는데, 그것은 타고난 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입양하여 그분의 자녀로 받으시기 때문이다. 죄인은 그의 죄를 그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담당하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는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 나의 자녀가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망의 선고를 유예하고, 나의 생명보험증권, 곧 영생을 그에게 줍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받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된다.”(믿음, 103)

    “한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잘못된 사상들을 받아들일 때의 위험이 나에게 반복해서 제시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단이 이 관점에 대하여 마음을 혼란시키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 나는, 구원에 대한 잡다하고 혼란한 사상들 때문에, 그리고 목사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고자 활동해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음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보았다.”(믿음, 18)

      의롭다 선언하심은 재창조임

    칭의란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의롭다”고 선언하는 사법적인 선포인 동시에 실제적인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창조된 영혼은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고 세상을 이기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말씀하시는 그대로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동의 하시는지요. 그리고 그 사실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그 누구도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는 사실과 모든 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사실을 인하여 소망과 안위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시는 일이 왜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안위가 될 것입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분에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약간은 모순처럼 생각 될지 모르나 사실은 하나님에게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어(창조)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에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언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던지 다만 말씀으로만 하십니다.

    인간들은 말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 속에는 그 말을 그대로 이룰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 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믿는 자들에게 안위와 소망을 가져옵니까? 이제 모두는 조금은 긴장하면서 다음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라고 선언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죄인이 의인으로 재창조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 말씀하셨기 때문 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즉시 빛이 창조 되었던 것처럼 말씀으로 “의롭다” 하시면 즉시 믿는 죄인은 의롭게 창조 되는 것입니다.

    첫째 날의 빛은 창조 즉시 빛을 발하였던 것처럼 의롭게 태어나는 즉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어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임

    거듭남의 진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경험하므로 성화의 생애를 살아간 사도요한은 다음과 같이 중생의 생애가 무엇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1-5)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은 거듭났다는 말이며 중생의 경험을 하였다는 말씀이지요. 모두는 믿고 동의 하실 줄 압니다. 그 다음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는 ”세상을 이기는 자” 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유혹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죄의 유혹들을 물리치고 승리의 생애를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처럼 확실한 말씀에 반기를 들겠습니까? 다시 또 요한은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2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요한은 자신의 경험과 아울러 거듭난 형제들의 경험을 실례로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범죄 하지 않는 줄을 안다(경험)고 요한이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체험이며 또한 칭의를 얻은 모든 영혼들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시여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입니까?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세상을 이기기가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칭의에 따르는 경험이 없거나 아니면 올바른 방법으로 거듭남의 경험들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증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죄악으로 인하여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그들은 돌쩌귀에 매달려 있는 문짝처럼 드나들 뿐이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가장 엄숙하고 감동적인 진리의 말씀을 충족히 들어 왔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의 귀중함을 점점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요동하는 책망과 경고의 증언들도 그들을 회개로 이끌지 못한다. 인간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가장 달콤한 멜로디-믿음의 칭의, 그리스도의 의-도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감사와 사랑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다.”(6증언, 426)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 목사와 교역자에게 보내는 특별 증언(Series A, No. 9, 1897, 61, 62).”(목사, 456)

      잘못된 유전과 가르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칭의의 두루마기는 그대로 입혀져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칭의의 두루마기는 우리의 죄를 가리어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유전과 가르침을 받은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의 의 옷을 벗기시고 회개하면 다시 입혀 주시는가? 라고 반문 합니다. 그러면 하루에도 우리들은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고 지었다가 회개하는 때가 많은 되 그때마다 의 의 옷을 입히셨다 벗기셨다 하시는 하나님이 신가 라고 반문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아직도 우리가 회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아담의 경우를 실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담은 범죄 하기 전에는 분명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완전하였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선악과라는 열매 하나를 따먹은 이후에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그는 의롭고 완전하였습니까? 그에게 의의 옷이 입혀져 있었습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의 느낌은 무엇이었습니까? 최초의 그의 느낌은 벗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그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창 3:11)라고 반문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옷을 빼앗아 가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벋었음을 말하더냐? 라고 하셨겠습니까? 죄가 아담의 옷, 의의 두루마기를 걷어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을 때 의의 두루마기는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변하지 않고 지금도 동일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의의 옷은 벗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옷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영혼 스스로가 의 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체가 의 의 옷을 벗어 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을 수 없으며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존재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운 밤이 올 때 하나님이 빛을 가져가시거나 밝은 아침이 올 때 어두움을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법칙이요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고도 의 의 옷이 벗겨졌다는 느낌이 없다면 그는 처음부터 의 의 옷을 입지 않았거나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에도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그 죄를 반복하여 짓고 회개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 의 옷을 하루에도 벗었다가 입었다가 하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하는 영혼들은 아직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 연고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사실 그런 영혼들은 아직 칭의(거듭남)을 받지 못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를 지으면 의 의 옷이 벗겨진다는 사실 입니다.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의의 두루마기가 벗겨진 것처럼 지금도 죄 지은 영혼에게 의 의 옷이 벗겨지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범죄 하므로 스스로 의의 옷을 벗어버릴 수는 있지만 의 의 옷을 스스로 입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의 상태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칭의에 따르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옷을 벗기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벗겨져 버린 의 의 두루마기를 죄인들에게 다시 입혀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 의 옷을 입히시려는 것이 소원이신 분이십니다.

      칭의는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덮어준다고 믿고 있으며 품성의 결함과 부족은 채워 주셔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유전과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회개하고 버리지 않는 죄를 덮어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소망, 555)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나 품성의 결함을 당신의 의로 채워 주셔서 완전하게 보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들의 허물이나 죄, 품성의 결함이나 부족을 채워 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의 부족을 채워 주신다는 말씀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키려고 할 때에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도움을 기도하면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한 힘을 채우셔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 합니다. 그리고 또는 유혹이 왔을 때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길 수 없음과 부족을 깨닫고 기도할 때에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부족을 채우셔서 넉넉히 이기도록 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도록 부르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지 않으시면 그는 회개할 수조차 없다. … 구주께서는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끊임없이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끌려가겠다고 수락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은 참회로 녹아질 것이다. 사람은 영생을 위한 이 큰 싸움에서 한 몫을 할당받고 있다. 그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해야 한다. 흑암의 세력을 깨뜨려 버리는 데 투쟁이 요구될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나태한 중에 구원받아야 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불멸을 위한 싸움에서 모든 근육을 힘껏 사용하고 모든 능력을 활용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부족을 채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8증언, 64-65)

     예수님도 지상에 계실 때 “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은 예수님 스스로의 힘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승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족함을 아버지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채우심을 받아 승리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분명 부족을 채워주시지만 그 것은 결함이나 죄가 아닌 우리들의 힘과 능력의 부족을 그분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죄악이나 나태함에 대한 핑계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인도하셨고, 당신의 발자국을 따르도록 우리에게 바라신다. 우리가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그분은 우리들 중 아무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고, 희생을 당하셨다. 우리는 용기를 잃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신령한 능력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도와 노력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로 받으시고 그분 자신의 거룩한 공로로 부족을 채워 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관하여 많이 듣고 있다. 그러나 행함에 관하여 더 많이 들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안이하고, 편안하고, 고생 없는 신앙 생애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다.”(믿음, 49-50)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범죄하고 회개한 모든 죄인들에게 이런 능력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십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영혼들은 죄의 결과와 형벌의 용서만을 요구한 후 골방에서 나오고 있으며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새 마음을 받지 못한 채 기도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의 습관은 계속 반복하게 되며 죄의 종노릇하는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추측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요 사단이 만든 모조 믿음입니다.

    “믿음은 조금도 추측(推測)과 관련이 없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추측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추측은 사단의 모조판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소망, 126)

      거듭나는 것은 마음이지 육체가 아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칭의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개념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짐으로 또 다른 사단의 기만이 영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경험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런 영혼들은 칭의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개념이 잘못되어 있으므로 승리의 기쁨을 사단이 가로채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권투 선수가 경기를 끝낸 다음 분명히 이겼으면서도 승리했다는 판정이 없을 때에는 아직 아픔과 고통 속에 초조할 뿐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승리했다는 심판의 판정이 나면 그 때에는 고통도 아픔도 순간 다 잊어버리고 기뻐합니다. 승리의 기쁨이 모든 아픔과 고통을 압도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처럼 의롭다함을 받은 영혼이 매일의 생애 중에서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경험이 없고, 또는 오늘의 생애가 승리의 생애인지 패배의 생애인지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고달프고 초조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승리의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결과를 알지 못하므로 항상 초조하고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이 심히 많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영혼들은 너무나 힘든 신앙 생애를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잘못된 지식과 가르침을 믿고 있을 때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하나님께서는 하루의 생애동안 비록 힘이 들고 어려웠지만 하루의 생애를 마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고 승리한 기쁨이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압도하여 기쁨으로 하루의 생활을 마칠 수 있고 다음날의 승리를 위한 힘과 능력을 얻게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죄의식 속에서 살게 되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헤매는 가련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거듭났을 때 우리들의 몸에는 어떤 변화가 오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칭의을 얻고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육체는 거듭나기 전과 동일한 육체라는 사실입니다. 대뇌에는 아직도 죄의 지식과 경험들이 그대로 저장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율 신경은 죄의 습관에 익숙하여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고 뒷골에는 아직도 타락한 육신의 기질대로 행하려고 하는 습관을 그대로 가진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동의 하시는지요? 아니면 거듭나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기억 상실증 환자처럼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나쁜 습관들이 소멸되어 버리고 기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까? 도박꾼이 거듭난다고 하여 도박하는 기술과 습관이 소멸되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박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지 기술과 습관은 육체 가운데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거듭날 때에 거룩한 육체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는 불멸의 옷으로 갈아입는 재림 때에 거룩한 육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거듭났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거듭났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이 거듭나야 하는지 말씀을 유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2-23)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육체가 새롭게 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심령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다윗은 무엇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양심과 정신)을 창조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변화된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우리가 몸을 맑은 물에 씻을 때(침례를 받을 때) 거듭나게 됩니다. 그 후에 우리들은 거룩한 육체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그러면 이제 여기에 말하는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육체입니까? 아니면 마음입니까? 거룩한 육체가 아닌 마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롭게 거듭나고 재창조되는 것은 육체가 아닌 마음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지음을 받는 것이지 육체가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거듭난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정신)을 품고 살아가는 삶을 거듭난 영혼이라고 말 합니다.

      새 마음(정신)이란 어떤 마음(정신)인가?

    거듭난 마음(정신)이 타락한 육체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의 말씀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청년들이 특별히 “새 마음”이라는 이 귀절에 걸려 넘어가는 수가 있다. 그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들은 감정에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이것을 회심이라고 부른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위와 같은 오류에 걸려 넘어지고 파멸한다.

    사단은 사람들이 격렬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회개했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그전과 꼭 같고 그들의 생애에는 선한 열매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을 당한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감정 이상으로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광풍이 불어올 때 그들의 집은 휩쓸려 나가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 새 마음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그는 마음과 생활과 인격 전체를 의미한 것이다. 마음에 변화를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 붙은 애정을 거두어 그리스도께 묶는 것을 뜻한다. 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목적과 새 동기를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새 마음을 받은 표인가? 그것은 변화된 생활이다. 매 시간 이기심과 교만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지도자 1901. 9. 26).”(화잇주석, 겔 36:25,26)

    선지자의 말씀을 요약해보면 거듭난 영혼들이 어떠한 경험을 하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마음은 새롭게 창조 될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의지와 선택권을 활용하여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애정을 거두어 그리스도께 묶음 - 세상 포기함

    새로운 각오 -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순종할 마음의 각오

    새로운 목적 -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새로운 동기 - 십자가의 강권하는 사랑

    매 순간 이기심과 교만에 대하여 죽음 - 자기 십자가를 지는 굴복

    생활의 변화와 인격의 변화 - 진리의 원칙에 의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것,

    이런 것들을 누가 해야 합니까? 자신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야겠다는 각오는 누가해야하는 것입니까? 자신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하겠다는 결심은 누가해야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애를 살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결심하거나 각오를 하실 수 없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세상을 포기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배운 사랑 때문입니다.

    타락한 육체 속에서 문득 문득 죄악의 습관과 정욕이 일어날 때 누가 굴복해야 합니까? 그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매일 죽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새 마음이란 강렬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요 격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새 마음이란 생애의 목적과 동기를 바꾸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의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생애와 인격전체가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재림성도들이시여

    아직도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각오와 결심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생애의 목적과 동기를 바꾸지 못하고 부귀와 명예를 얻기 위하여 세상을 배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선천적 후천적인 죄악의 습관과 쾌락을 잊지 못하여 주님 앞에 굴복하지 못하고 전심을 바치지 못한 채 마음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새 마음을 얻고 거듭나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주님께 조용히 마음의 무릎을 꿇어 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을 포기하시고 부귀영화와 존귀를 버리시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고 어떠한 고통과 시련도 달게 받으시고자 각오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포기 하십시오 생애의 목적과 동기를 바꾸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해 보십시오. 그 때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10)

    그 때에 주의 성령은 새로운 삶의 목적과 동기와 각오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새로운 정신과 마음을 창조해 주실 것이며 진정한 생애의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3-8) -아멘-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