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지금까지 우리는 “세 천사의 기별과 경험들”이라는 주제로 12회 동안 연구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번호부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경험과 증거”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간이 허락하고 지면이 허락하는 동안 함께 연구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 가운데 칭의(거듭남), 성화, 온전함으로 나누어지는 의의 경험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번호에는 먼저 칭의에 관하여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라”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지는 기별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만큼 많이 전해지는 기별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단순 명료하여 어린아이들이라도 깨달을 수 있으며 노인이라도 오해할 필요가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기별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단순하며 지식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기별이지만, 이 진리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이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때를 내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세상이 언제 또 있었습니까?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의 수효가 얼마나 되며 재림신도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결코 적은 수효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는 예수님의 한탄스런 말씀은 어찌된 영문인지요?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무슨 믿음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우리가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먼저 우리에게 왜 믿음이 필요하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는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믿을 것이 전혀 없다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소망이 없고 믿을 것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실날 같을지라도 무엇인가를 믿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믿는 바가 돈, 명예, 권세, 쾌락, 지식, 취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건강, 젊음, 하다못해 자신의 주먹이라도 믿을 것이 있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헛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믿음의 실체가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오게 되며 그때에 그들은 절망 중에 음부로 내려가게 됩니다. 자신들이 믿는 믿음의 실체가 죽음을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믿는 믿음의 실체는 무엇이며 누구입니까?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밀음의 실체입니다. 그분의 신분은 하늘과 땅과 물들의 근원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오직 말씀만으로 하늘과 땅과 물들의 근원을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7, 9).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아! 우리가 믿는 믿음의 실체는 얼마나 확실하며 믿음의 주제이신 그분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십니까? 그분은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부르시면 마치 존재가 있었던 것처럼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롬 4:17)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믿는 구세주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의 어떤 소망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불가능이 없는 그분을 우리는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가 믿는 그분의 이름과 능력에 합당한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창조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그분의 능력과 이름에 합당한 큰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에 비해서 너무도 작은 믿음과 너무도 보잘것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보시기를 원하시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 후면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느 바리세인과는 다르게 외식적인 사람이 아니라 진실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며 도덕적으로 거의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 자신은 내심으로 심히 놀랐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듯이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당대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순간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받았고 굴욕적인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그 결과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순결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의를 가지고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봉사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의 그의 자선과 관대함이 높이 평가되었으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에서는 하늘나라가 그에게는 너무 깨끗하여 들어가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소망, 171).

   “니고데모는 흐린 마음으로 이 성경의 말씀들을 읽었었으나 그는 이제 그 말씀의 뜻을 깨닫기 시작했다. 외적인 생애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율법의 조문에 대한 문자적 순종은 그것이 아무리 엄격하게 지켜진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하늘 왕국에 들어가게 하는 자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니고데모는 깨달았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니고데모의 생애는 의롭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 앞에 있을 때에 그는 자기의 마음이 부정하고 생애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망, 174).

   하늘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의로움을 가지고 들어가기에는 너무도 순결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순결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순결은 타락한 인간들이 결코 만들 수 없으며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이룰 수 없고 오직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거듭남을 경험한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시 한번 태어나고 의롭게 재창조되는 일이 없이는 결코 이런 순결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요 지식이 아니며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영적인 중생(칭의)을 경험함으로써만 하늘에 합당한 순결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니고데모는 흐릿하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보다 영적 중생이다”(소망, 171)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재림 성도들이시여, 우리들은 과연 거듭났는지요? 어떤 바리세인의 의보다 더 순결하고 아름다운 의를 소유하고 있는지요? 그렇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일에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남의 증거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7-8).

   거듭남의 진리는 모든 기독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로 가르쳐지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칠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은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거듭남의 교리를 설명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나, 거듭남의 교리를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의 높은 직분을 가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태교인으로 태어나 일평생을 복음을 전하며 나름대로 순종하며 살아올 수 있으나 거듭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단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다 듣고 인정하더라도 아직 개인적 경건과 참된 경험적 신앙을 전혀 모를 수도 있다. 그는 남에게 구원의 도를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자신은 버림 받은 사람이 된다.” (전도, 68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또한 우리는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주님은 우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있으므로 거듭났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서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론적으로는 틀림없는 사실이며 교리적으로 볼 때에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전혀 거듭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거듭나지 않은 영혼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진리는 교회의 녹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구원의 교리는 교회 녹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 있는 다수에게 불가사의이다.” (3기별, 188).

   “거듭남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과정이다. 세속적이고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그분의 은혜의 매력과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깨닫게 함으로 영혼이 거룩한 사랑에 젖고 하늘의 신비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죄인이 이러한 일들을 이해할 때, 그의 이전 생애는 가증하고 증오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그의 마음을 깨뜨리게 되며, 그리스도를 영혼의 생명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2증언, 294).

   “거듭남은 우리 시대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진귀한 경험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그토록 많은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성화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은 침례를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를 치루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원고 148, 1897).” (화잇주석, 롬 6:1-4).

   “고백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름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녹명책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생명책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20명의 젊은이들 중 한 사람도 체험적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없음을 보았다.” (1증언, 504).

   “교인들은 하나님, 그분만을 위하여 살겠다는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이기적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과 연합하였다. 교만, 쾌락의 추구, 죄악이 소중히 여겨졌으며, 그리스도는 떠나가셨다. 그분의 영은 교회 안에서 소멸되었다. 사단은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분별력이 너무 없어서 그를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들은 사업에 대한 부담이 없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엄숙한 진리는 그들에게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하였다.” (2증언, 441).

      거듭남의 증거를 확인하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 5:1).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거듭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요 3:11)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을 참으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도 쉽고 단순하며 오해할 여지가 전혀 없는 확실한 진리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것을 믿지 않는 신자들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면 모두가 다 거듭났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으로 거듭났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남의 체험은 무엇이며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7-8).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바람의 역사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거듭난 영혼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하며, 마음의 동기와 사상과 목적의 변화와 함께 생애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거듭남에는 어떤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께로 태어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성화의 생애가 바로 거듭났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 확실한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또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6-8).

   이 말씀은 또 어떻습니까?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죄를 짓는 자들은 아직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으며 아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거듭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이름을 거듭난 자들의 명부(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이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확실합니까? 그리고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분명gl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입니다.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의 어떤 변명도 오해도 있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죄를 짓는 생애를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도, 의를 얻은 것도, 구원에 참여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다 할지라도 비록 높은 지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거듭난 것이 아니며 아직도 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결단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여 무엇이 참된 거듭남인지를 전혀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 태어난 자들은 자녀의 권세를 받음으로써 마귀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마귀의 권세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자녀로 있었을 때 죄를 짓는 생애가 쉬웠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을 때 의를 행하며 사는 것은 당연하고 타당한 일입니다.

   거듭나지 않았을 때 결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죄의 유혹을 이기려고 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마치 종(노예)이 주인을 대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대적하는 일은 그 결과가 항상 비참합니다. 죄를 짓는 자들은 마귀의 종입니다. 마귀의 종이요 자녀들이 마귀를 대적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거듭나지 않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입니다.

   진실로 거듭날 때만이 마귀의 권세에서 벋어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후에도 죄를 짓는 생애를 산다면 그것은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죄를 짓는 생애를 살면서 거듭났다고 믿는다면, 그러면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알고 있는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 공언이 어떠하든 아직까지 마귀에게 속하여 있다고 확신하여도 좋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8).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듭남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재림성도들이시여,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어떻습니까? 과연 거듭났다는 말을 할 수 있을는지요. 그러나 지금까지의 말씀은 확실한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난 후에 자신의 거듭남의 체험을 이렇게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 요한의 체험이었다면, 우리들의 체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결코 이 진리를 다르게 해석하려고 하는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수준과 경험에 알맞은 해석을 하도록 유혹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와 같은 거듭남의 경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욱 절망으로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관원과 같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영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관원과 같이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라고 마음 속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관원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표준으로 볼 때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무엇인가 구원을 얻기에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자 관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이 구원 얻기에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그에게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0-23).

v그의 외적인 행동에는 흠이 없는 것 같았으나, 아직 마음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이 부자 관원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고 아직도 이기심이 그 마음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에게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부자 관원이 구원 얻기에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하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가진 자들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이기심과 탐심을 가진 자들은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재림성도들이시여, 우리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요? 만약 우리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이기심이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실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금을 바치고 음식물을 절제하며 경건한 모습을 가지고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진실로 거듭나지 못했다면 부자 법관과 같이 구원 얻기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바로 부자관원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재림교인들은 세상의 표준으로 볼 때, 별로 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재림교인들만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며 음식물을 절제하며 순결한 생애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구원 얻기에는 심각한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을 받고 있으나 무엇을 회개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 라오디게아교회의 상태입니다.

    마치 도덕적으로 별 흠이 없었던 니고데모와 부자 관원과 같이 그리스도를 만나기전까지는 전혀 거듭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은 무엇인가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선행으로 그 부족함을 채워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부족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은 선행과 도덕으로 자신의 부족을 가리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마치 무화과 잎사귀와 같아서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는 여지없이 수치는 드러나고 맙니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인간 도덕가에 불과하다.” (실물, 315).

   우리는 인간적인 도덕적 순결만을 가지고 하늘 문을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생각과 마음을 정죄함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통찰하며 은밀한 마음의 동기를 정죄하며 어떤 기회와 환경이 주어지면 범죄할 수도 있는 죄들도 정죄하여 하늘가는 길을 막을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 얻기가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결코 율법은 죄인들을 위하여 조금도 빈틈이나 원칙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은 하늘 문어귀에 서서 어떠한 작은 죄라도 하늘 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다시는 하늘이 죄로 오염되지 않도록 율법은 철저하게 하늘입구에서 조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기심, 질투, 탐심, 시기, 미움, 분노, 참소, 비난, 정욕, 부절제, 분쟁, 부모거역, 수군수군함, 교만 등은 하늘 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도덕적인 행위로 아름답게 자신을 가릴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은 그런 것들을 찾아낼 것이며, 결국 문밖에 던진 바 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의 원대한 요구를 강조하였다. 그는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덕성의 깊은 비밀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견해와 지식으로부터 감추어진 것을 환하게 밝혀 주는지 보여 주었다. 손이 행하는 것과 혀가 말하는 것 곧 외적 생애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불완전하게 나타낸다. 율법은 인간의 사상과 동기와 목적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밀히 숨겨 둔 정욕, 질투, 증오, 색욕, 야망,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꾀하는 악한 행위들은 비록 기회가 없어서 실행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은 이 모든 것들을 정죄한다.” (행적, 424).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은 그 요구 조건의 한계가 광범위하다. 모든 원칙이 거룩하고 공정하며 선하다.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지운다. 율법은 사상과 감정에 호소하며 또한 율법의 요구를 범한 사실을 깨닫는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회오를 일으킨다. 만약 율법이 외형적인 행위에만 그 요구를 한정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그릇된 사상이나 악한 욕망과 음모 등에 대하여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영혼 자체가 순결하게 되고 정신이 거룩하게 되어 사상과 감정이 사랑과 의의 원칙과 일치하게 되기를 요구한다.” (1기별, 211).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시 19:7)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의 그 단순성, 포괄성 및 그 완전성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가! 율법의 내용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계명을 쉽게 암기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너무나 원대하며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외형적인 행동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사상, 의도, 욕망 및 정서까지도 살핀다. 인간의 법률은 이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의 법률은 다만 외형적인 행동만을 제재할 수 있다. 인간은 범죄자이면서도 자신의 악행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길 수 있다. 또한 도둑질, 살인, 혹은 간통죄를 범한 형사상(刑事上)의 범인이 되고서도 발견되지 않는 한 법률이 그를 범죄자로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속에 들끓는 질투, 시기심, 증오심, 악의 원한, 정욕 및 야심 등을 주시(注視)하여 본다. 이러한 악의 씨들은 뜻은 있으나 기회가 없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죄악적인 감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전 12:14)실 그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1기별, 217).

   재림성도들이시여, 율법의 거울을 들여다 볼 때 혹시 우리의 마음이 정죄를 받고 있지는 않는지요?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다면 아직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다면 어찌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어떤 형제들은 급한 성격을 억누르지 못하여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이며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거듭났는가? 라고 반문하실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처럼 말입니다.

   1888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와그너와 존스 형제에 의하여 칭의(거듭남)의 진리가 제시되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심히 자존심이 상하였는데, 그것은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 죄를 지적 받은 것이 아니었지만, 곧은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그들이 정죄를 받았으므로 몹시 자존심이 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분들이었기에, 더욱 자신들의 죄악을 시인하기가 어려웠고 자존심은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쪼개어 불순한 그들의 생각들을 끄집어내었고 니고데모에게처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니고데모처럼 겸손하게 그리스도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히 상처받은 자존심과 교만이 자신의 악함과 죄를 시인하기를 싫어하였고 회개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결국 그 진리를 거절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진리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는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칭의(거듭남)를 경험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잘 알고 있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진리로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모두는 지금까지의 말씀들로 인하여 니고데모처럼 심령이 상하였을는지 모릅니다. 혹시 자신이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으므로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언짢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진리이지만 거절할 위험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영광을 티끌 속에 던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거듭남을 결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 목사와 교역자에게 보내는 특별 증언(Series A, No. 9, 1897, 61, 62).” (목사, 456).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이 같은 성령의 역사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물, 96-97).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마음속에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실물, 97).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실물, 312).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도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수 있다. 사람이 겉으로 나타나는 범법 행위만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속의 비밀을 저울질한다. 모든 행동은 그 행동을 조장한 동기에 의하여 판단된다.” (실물, 316).

   “예수님은 협잡꾼이 아니며 성경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는 것만으로 넉넉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어떠한 공언을 하든 간에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실물, 312).

   칭의는 죄를 덮어주거나 가려주지 않습니다. 죄를 숨기며 변명하는 자들에게 칭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거듭남의 경험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듭남의 경험도 없이 안식일을 지키고 교회에 출석하며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면서 구원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참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인지 아니면 율법주의자들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재림성도들이시여, 여러분은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참으로 거듭남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요? 각자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고 증거들을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론이 아니며 체험이요 마음과 생애의 완전한 변화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기심, 질투, 탐심, 시기, 미움, 분노, 참소, 비난, 정욕, 부절제, 분쟁, 부모거역, 수군수군함, 교만 등은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을까? 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바뀌어진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이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바뀌어 질 때, 이제 이것은 비밀이 아니요 이론이 아닌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마음(양심)이 재창조되는 것, 이것이 참된 거듭남입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는 말씀 앞에 겸손히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참된 거듭남의 진리를 함께 배우고 경험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