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9 : 구원받는 수효가 그렇게 극소수인가?


답변 : 십사만 사천인, 세 천사의 기별로 구원 얻는 무리가 그렇게도 극소수인가? 라는 항의성 질문은 아직도
쇄도 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무리들의 인원을 제한하시는 것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1844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 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인 무리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를
재림교회의 역사자료를 챙겨 보면서, 그리고 약 1,300만 명의 거대한 재림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자신의 구원의 확률을 따져 본 후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치 소수의 학생을 선발하는 명문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학생이
그 대학을 지원하는 학생의 수효가 많음으로 과연 저 많은 학생들을 제치고 내가 입학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난감해 하는 학생과 같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과 경쟁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연구하지 아니하고 극히 인간적인 상식으로 진리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있다. 세 천사의 기별로 구원 얻는 무리가
십사만 사천인이 아니요 1억 4천 4백만 명이라면 구원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믿어지는가?

아니면 십사만 사천인이 헤일 수 없는 상징적인 수효라고 한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아마 그렇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감정과 느낌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도록 이끄는 사단의 방법이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도 이런 사단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니까 선악과 하나 따먹었다고 멸망시키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이것이 추측하는 모조 믿음이다.

“그처럼 당신의 사랑에 대한 많은 증거를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한번의 범죄는 용서해 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두려워했던바 그렇게 무서운 형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57.

구원의 확률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쫓기어 자격이 없는 사람을 구원의 반열에 참가 시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구원받을 영혼들의 수효가 차지 않으면 이 세대는 모두가 또 광야에서 잠들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한 세대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숫자의 많고 적음이
나의 구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신 빛에 따라 심판 하신다. 아담이후 1844년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과
그리고 그 이후라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인 안식일을 모르고 주어진 빛대로
믿음을 따라 구원에 참여할 오늘날 개신교회 성도들은 헤일 수 없는 무리들 중에 속할 것이요,
1844년 이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인 안식일을 깨닫고 충실하게 믿음으로 생애한 재림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십사만 사천인들의 구성원이 된다.

그러므로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로 구원을 받는다면 십사만 사천인의 특권을 누릴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구원에 탈락이라는 이 엄청난 사실을 빨리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셋째 천사의 기별인 이 인치는 진리를 확실히 이해한다면 모두는 영적 졸음에서 깨어날 것이요
믿음의 각오는 달라 질 것이다.왜냐하면 셋째 천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치는 천사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 무리는 십사만 사천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십사만 사천인에 들어가지 못하면 헤일 수 없는 무리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차등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단의 기만 이다.

마치 명문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부족하면 수준이 낮은 대학에 들어가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이처럼 확실한 진리를 버리게 하고 십사만 사천무리들을
상징적인 숫자라고 말함으로 재림성도들의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어 버렸고 믿음은 뜨뜻미지근하게 되고 말았다.
사단이 주는 거짓 평안인 것이다.
그러나 십사만 사천인들의 수효가 차는 그날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고 만다.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선고가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한 천사가 잉크 통(뿔로 만든)을 가지고
지구에서 돌아와 예수님께 자기의 일이 끝났음을 보고하고 성도들의 수가 차서 인치는 사업이 마쳤음을 보고했다. 그러자 나는 십계명이 들어 있는 법궤 앞에서 봉사하시던 예수께서 향로를 내던지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의 손을 치켜들고 ‘다 이루었다’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엄숙하게 선포하실 때 모든 천사들은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던졌다.”-초기, 279-280.

확실한 이유

확실한 것은 구원받는 무리가 극소수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도덕적인 관점에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구원받은 무리가 극소수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노아 할아버지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엄숙한 기별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여덟 식구 밖에는
아무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 외 모든 사람은 멸망을 당했다.

그러면 그들이 왜 멸망을 받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홍수 때문에 멸망을 받았는가? 아니다.
그들은 홍수 때문에 멸망 받은 것이 아니라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다.
그러면 왜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배가 한 척 밖에 없어서 비좁아서 탈 수 가없었는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 때문에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확실한 이유이다.

오늘날도 만약 재림 성도들이 구원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십사만 사천인들의 수효가 적어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신 하므로 구원과 특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멸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소돔성에 많은 의인들이 있으리라고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곳에 의인 50명을 찾으면 용서 하실 수 있는지를 하나님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허락을 받았으나 의인 오십을 찾지 못하였고 결국은 의인 10명을 찾지 못하여 그 성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도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셨다.
당시 이스라엘백성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비유되었다. 그 누가 이 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처럼 무성하고 큰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누가 상상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나무에 열매를 찾았으나 열매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백성인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은 어떤가?
1844년 이후 이미 잠든 재림성도들이 얼마나 되며 현재 약 1,300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무화과나무에
아직도 십사만 사천인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렇게 구원 얻기가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라고 부르짖는다.

마치 예수님 당시 많은 무리들처럼 말하기를,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0, 66)고 한 역사를
교훈이나 삼은 듯이 오늘날 교회들은 이것을 염려한 나머지 신자들을 잠재우는 설교들을 하고 있다.
이미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감히 예수와 성경상의 명료한 진리를 설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게 되면
이 육적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초기문집, 228).

예수님께서는 돌아가는 무리들을 보시고 말 할 수 없는 연민의 정으로 측은하게 보셨으나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명료한 진리를 감추시는 일은 없었다. 오늘날 교회는 사단의 기만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료하고 확실한 진리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복음들이 교회 안에 난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아가는 다수의 무리를 위하여 진리를 변개 시키거나 표준을 그들의 수준에 맞도록
낮추시지 않으실 것이며 준비되지 못한 영혼들로 하늘을 채우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극소수의 무리가 구원을 받음

매 시대마다 극소수만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의 말씀보다는 당시의 전통이나
상식화된 신학과 맹목적으로 지도자들의 말을 더 신뢰하였던 것이 극소수만이 구원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를 간과하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관습, 습관, 전통을 답습할 위험이 언제나 있다. …
‘주께서 말씀하신다.’고 한 분명한 말씀에서 떠나 인간의 이론과 교훈으로 향하게 된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영적 사물들을 드러내 줄 수 있음 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진리,
곧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이 해석하는 빛에 의하여 설명된다.” -증언보감 2권, 423.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20).

“거룩한 여인과 그 자손들로 상징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극소수라고 한다. 마지막 때에 남은 자손이
여전히 있을 것인데, 이 사람들에 대해서 요한은 말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하였다 (사인즈 1899. 11. 1).” -화잇주석, 계 12:3-6.

“온 하늘은 예수님과 연합하였으며 그들은 ‘다 이루었다’하는 두려운 소리를 들었다.
구속의 경륜은 성취되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인 자는 극소수였다. 부드러운 자비의 음성이 사라지자
두려움과 공포가 악인들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들이 두려워 떨면서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하고 외치는 분명한 소리를 들었다.” -초기문집, 281.

잘못된 항의

노아는 120년 동안 세상에 경고의 기별을 보냈다. 홍수가 나서 이 세상이 멸망 받을 것을 외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산 위에서 한척의 방주를 지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많은 배를 만드시지 않으시고 한척의 배만을 짓도록 하셨을까?
당시의 인류가 오늘날 인구보다 적지 않는 많은 인류가 살고 있었다.
그 많은 인류를 위하여 한척의 배 만을 준비하시다니!

그렇다면 이런 일이 이러날 법도 하지 않았을까? 홍수가 내리면 구원 얻을 방법은
오직 이 한척의 방주에 들어가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노아 할아버지에게 몰려와
선착순으로 자신이 먼저 이 배를 타게 해달라는 청탁이 쇄도하고 어떤 이는 거액의 돈을 가지고 와서
자신과 가족이 선착순으로 방주를 탈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 하는 사람들로 산위에서는 법석이 일어 날 것이다.

노아 할아버지는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방주를 더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상황이 일어나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하나님께서는 그 한척의 배에 채울 승객도 찾지 못하시고 겨우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태웠을 뿐이셨다.

과연 당대의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는 것이 진실이라면
왜 많은 배를 만들지 않고 한척의 배만을 지으십니까? 이 한척의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탈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비가 없으신 분이 신가요? 이 많은 사람이 모두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라고
노아 할아버지에게 항의의 질문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질문에 그들은 먼저 대답 하여야 한다.
당신은 한척의 배가 비좁아서 타지 못하셨던가요?

왜 십사만 사천인인가?

오늘날도 같은 질문이 쇄도 하고 있다. 왜? 겨우 십사만 사천인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오늘날 재림교회의 신도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왜 십사만 사천인의 인원제한을 두시는가? 그렇다면 나는 일찌감치 구원을 포기하고 말겠다는
협박성 질문에 의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기가 죽는다.

재림 성도들이여, 십사만 사천인의 수효가 너무 적어서 자격은 있으나, 자리가 없어
구원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라고 생각하는가? 스스로 속이지 말자. 주님께서는 1844년 이후 아직까지
십사만 사천인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여 오늘도 하늘 지성소에서 손을 들고 계신다.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109년전 화잇 선지자가 생존하여 계실 당시이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현재 녹명책에 기록된 20명중 한 사람도 영원을 위하여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개탄 하였다.
오늘날에 비교하여 당시의 재림교회의 신자들은 얼마나 경건하며 신앙심이 깊었는지는
과거의 역사와 세대의 변천사를 연구해 보면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재림교회의 녹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몇 명중에 한명이 준비되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라.
더군다나 인치는 천사의 기별의 중요성과 구속의 경륜을 무시해 버리고 일반 개신교회들처럼
구속의 열매들인 십사만 사천인 들을 상징적인 수라고 가르치는 재림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나는 교회를 향하여 엄숙한 말을 한다. 현재 교회 녹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십명 중 한 사람도
그들의 지상에서의 생애를 마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로 일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와 같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선교봉사, 41 (1893년).

십사만 사천인들의 품성은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품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실수효인 구속의 열매들,
곧 십사만 사천인들을 상징적인 수효인양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십사만 사천인의 구원이 아닌 헤일 수 없는 구원을 기대하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도 그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은 십자가의 공효와 능력으로 신자들을 성소의 첫째 칸을 지나
지성소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품성의 온전함으로 이끌어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과 점이 없어야 하는 품성완성의 목표 지점인 지성소의 복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믿음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야 할 신자들을 성소의 뜰과 첫째 칸에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는 십사만 사천인의 힘 있는 교리가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지성소를 정결케 하고 회복하는 기별이며 재림교회의 사명과 존재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성소의 빛을 받은 자들이 성소의 첫째 칸과 뜰에 머물러 있다면
어찌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신자들은 주어진 빛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성소의 저울로 달려질 것이다. 그 교회는 받은 바 특권과 이점(利點)에 의하여 판정을 받을 것이다. 만일 그 교회의 영적 경험이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대가로 그에게 준 특권에 일치하지 못한다면 … ‘부족함이 뵈었다’는 선고가 그에게 내릴 것이다.” -교회증언 8권, 247.

“주님께서는 나에게 귀중한 영혼들이 현대진리 곧 인치는 진리와 때에 적당한 식물의 부족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음과 또한 신속한 사자들이 저들의 길을 달려가서 현대진리로 양떼를 먹일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나는 한천사가 ‘빠른 사자들아 급히 가라’ ‘빠른 사자들아 급히 가라 ’ 고 말하는 것과 모든 영혼의 운명은
생사간에 각각 신속히 결정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현대진리 1권, No. 3, p. 3.

지성소의 빛을 받지 못한 일반 개신교회의 심판과 지성소의 빛을 받은
재림교회의 심판의 척도가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지성소의 요구가 무엇인가? 죄짓지 않는 완전한 생애와 흠과 점이 없는 품성이다.
이런 품성의 소유자들이 십사만 사천인이 될 때 우리 주님은 중보의 향로를 던지시고
지성소를 나와 이 땅에 재림 하시는 것이다. 이 분명한 진리를 교회는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런 분명한 진리를 버리고 마치 토요일 안식일만 지키고 믿기만 하면
만인이 구원받기라도 하듯이 일반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

교회가 재림교회의 존재의 목적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명목상의 신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이처럼 명료한 진리를 무너뜨리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할 수가 있을까?
토요일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여 모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은 아니며
그리고 인침 받은 십사만 사천인의 수효가 차지 않으면 예수님은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침노하는 자들만이 들어감

아직도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온 마음과 뜻을 다 바치는 자들을 위해
십사만 사천인의 한 자리가 남아 있음을 감사하자.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에 침노한다는 말은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을 말한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안정이 없다. 준비하는 일을 하려면 결심, 자아 부정, 헌신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화잇주석, 창 32:26.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에 쓰라린 실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뜨뜻미지근하고 반만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공공연한 불신자보다 휠씬 더 하나님께 욕을 돌린다.” -편지, 121, 1903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악한 기질들을 정복하고자 바라고 소원만 하다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않는다.” -가정과 건강, 139.

“우리는 단호하며 전심 전력하는 그리스도인이거나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 16).

나는 어떤 이들이 아직도 자기 부정이나 희생이 무엇인지,
혹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희생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제단 위에 그들, 즉 그들 자신의 몸을 바치지 않았다.” -증언보감 1권, 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144,000인 가운데 들도록 힘써 노력하자”
-리뷰 앤드 헤랄드, 1905. 3. 9.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