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 너희도 온전할"

방금 우리가 부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러"(찬미 487)라는 찬미는
"그러므로 ...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슴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마5:48)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에게 "완전한데 나아갈 것이니라"고 권고하고 계신다.(히6:1) 여러분과 내가 전하는 복음의 전파가 바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골1:28)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온전함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온전함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이 온전함을 기대하여야 한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이 온전함을 기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온전함의 표준에 완전히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로부터 온전함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한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말씀에서 여러분과 내가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확고하므로 여러분과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온전하게 되는 길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여러분과 나로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온전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함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며 여러분과 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가 행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주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온전함에 털끝만큼이라도 부족한 것은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도록
확고히 하자. 우리 각자가 이렇게 하기를 확고히 하고 또 영원히 이러한 태도에 변함이 없어야 하며
오직 그 길만을 구하도록 하자. 그러면 온전하게 되는 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 표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표준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이 그 표준이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유일한 표준이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그 표준에 확고하게 서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을 항상 구하고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의 표준을 허용하지 않을
마음의 태도를 가지지 않을 때에 우리 자신이 그 온전함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결코 변명하거나 구실을 붙일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크거나 전능하거나 전지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은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함은 하나님과 같은 품성의 온전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이 표준을 세우셨고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오직 이것만을 기대하여야 하며 오직 이것만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러분과 내가 가져야 하는 하나님 자신의 온전함이며 우리 자신이 그것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항상 그 표준에 머무를 때에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공의 앞에 계속 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우리 모든 사람이 의롭다든지 혹은 악하든지 간에 서야 할 곳이다. 그러면 왜 거기에 서서
그 일을 마치지 않는가?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고 거기서 우리 모두가 그 표준에 의하여
심판을 받기로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것을 세상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서약이다.
여러분과 나는 그 부활을 믿는다. 그러면 왜 그곳에 들어가서 확고하게 서지 않는가? 왜 기다리는가?
기다리고 또 계속 기다리는 자들은 그곳에 들어가 설 수 없을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은 이 심판에 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서 심판의 표준에 이르며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에서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어느 순간에도 심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그곳에 있으며 그 심판을 통과하고 있다.
그들은 심판과 그 심판이 가져오는 모든 결과를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거기에 서서
그 위로 중과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표준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안전하다.

이 일에서 오는 축복은 바로 지금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하여 누구나 필요로 하는 모든 보상이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을 때에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두려움을 내쫓을 때에 그 일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오직
우리가 심판에서 그 심판의 완전한 표준에 이르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에만 이르러 올 수 있다.

이것은 해결되었으므로 이제 그 길을 알아보자. 이 길이 우리의 전부이다. 나의 표준은 참된 표준이 아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유일한 표준이다. 그런데 누구의 표준이 측정이나 누구의 표준의 판단이 적절한 것인가?
나의 측정이나 판단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측정할 수 없다.
이 말씀을 기억하는가? 아마 이 순간에 이 말씀이 생각날 줄로 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시 119:96)

유한한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볼 때에 우리는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온전함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으로 판단하는 하나님 자신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나 내가 판단하려는 모든 계획이나 이에 관련된 모든 일을 완전히 버리게 한다.
내가 표준을 측정할 수 없을 때에 비록 그 일을 하도록 준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완전히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이것 역시 오래 전에 말씀하였다.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마디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나를 호출하겠느냐?"

그러면 내가 탄원하러 올 때에 무엇을 탄원할 것인가?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측정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그 측정된 결과를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과 동떨어질 때에 내 자신의 판단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완전히 정죄한다.
그 안에는 칭의의 기초가 없다.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내 자신의 온전함에 표준은 하나님의 온전하심 앞에 놓고 볼 때에 너무나 초라할 것이므로 내 자신이 그것을
천히 여길 것이다. "내가 눈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욥 9:2,3,19-21,30,31)

만일 우리에게 표준을 주어 이르도록 하셨다면 우리가 그 표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온전함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모든 생각을 영원히 버리도록 하자.
온전함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대하시고 또 이를 위한 준비를 해 두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함을 받은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품성의 표준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품성이 우리의 품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품성 중의 하나만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품성 자체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가져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성경 세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 첫번재 말씀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시작하여 4절에서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관하여 가지고 계시는 그의 유일한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모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러할 때에 왜 우리가 거기에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 왜 우리가
바로 지금 우리의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어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두번째의 성경 구절은 골로새서 1장 19절로 22절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목적으로 만드셨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이런 뜻에서 완전히 이탈되었고 모든 뜻이 좌절되었지만 그는 십자가를 참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기를 기뻐하셨고 그리스도께서도 이와같이 하기를
기뻐하셨다.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화목시켰고 이 원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
이 뜻은 세상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가져오신 그리스도의 보혈과 화목과 평강은 우리를 거룩하게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가지셨던 일을 이루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곧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길,
곧 그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분이 그 길로 오셔서 우리에게 그 길을 가져다 주셨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내가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분 자신이 이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조금도 이 일을 하러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제 에베소서 4장 7절로 13절에 이 일에서 무엇이 정말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그 필요를 얼마나 충만하게
공급하셨는지를 보도록 하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이제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의 선물은 무엇을 이루는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룬다.
(골1:20)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신 자들로, 다시 말하면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런 역사를 하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정하신 뜻을 이루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한 길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에게 같은 분량을 따라 바로 지금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 안에 이루신다.

이제 계속해서 읽어가 보자.
그러면 이것은 모두 온전함이라는 말 자체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는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이여 이 선물들을 이런 목적으로 주실 때에 우리는 그 사실에 직면하여 그 선물들을 갈망하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뜻을 이루는 선물들을 받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이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주셨고 하나의 분명하고 뚜렷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시고 그 뜻이 이루기까지 주셨다. 그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셨으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주셨다.

이와같이 온전함은 우리의 유일한 목표이다. 하나님의 표준은 유일한 표준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표준에 이르도록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없고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 목적이 죄에 의해서 좌절되었을 때에 그의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그 표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셨으며 성령의 선물들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이것을 확실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묻는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향하여 오직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가?
유다서의 24절은 지금까지 읽고 말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신 것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모든 기회를 잃었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 하셨다.
그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는 권리를 사셨다.
이 일을 할 권리가 오직 그에게만 있다.

여러분과 나는 이 일을 하도록 주신다 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가 이것을 상실하였을 때에 갈바리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이것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 값을 지불하신 분 외에는 아무도 갈바리의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 값을 지불하신 분만이
우리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값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 그 권리는 갈바리의 십자가의 권리에 의하여
오직 그에게만 속한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은 이 일을 이룰 책임을 짊어질 권리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그러므로 이 일을 이룰 책임이 그분에게만 있다.
그는 "능히 … 하실 자"이다. 그는 "능히 …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이다.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그분이 십자가가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능히 …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이다. 언제 하실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언제인가? (청중:지금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는 과거에나 미래나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의 길에 의하여 그것은 바로 지금 또는 언제나 여러분과 나에게 이르러 오는 것이
항상 사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이것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연구하자.
로마서 5장 21절을 읽고 그 다음에 6장 전체를 쭉 훑어 보라. 이 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로마서 5장의 마지막 두 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같이","또한"을 비교, 아니 대조해 보자. 비교는 결국 대조하기에 이른다.
"죄가 … 왕노릇한 것같이" 우리는 죄가 어떻게 지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죄가 어떻게 다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도 죄가 어떻게 왕노릇한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죄가 왕노릇할 때에 그 지배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일을 하는 것보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더 쉽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마는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것이 죄의 지배이다.
그러므로 죄가 다스렸을 때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쉬웠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은혜가 다스릴 때에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쉽다.
이것은 비교이다. 주의해 보라. 죄가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왕노릇한다.
죄가 지배할 때에는 그 지배는 은혜를 거스렸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능력을 뒤로 물리쳤다.
그러나 죄의 권세가 꺾이고 은혜가 지배할 때에 은혜의 지배는 죄를 거스리고 모든 죄의 권세를 물리친다.
그러므로 죄의 지배 아래서는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같이
은혜의 지배 아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길은 분명하지 않는가? 그 길로 가자.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회중: 그럴 수 없느니라) 여러분이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죄짓지 않도록 금하셨고 여러분이 그것을 시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조금도 죄짓지 않도록 금하시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시인하는가?
여러분은 은혜의 지배 아래서 전혀 죄짓지 않도록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시인하는가? (회중: 그렇다)

그러면 여러분과 내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뜻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기대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절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뜻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2절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는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어떻게 더 살겠는가?
그러면 2절에서 무엇을 의도하는가? 우리가 전혀 죄 가운데서 계속 있지않을 것을 뜻한다. 죽으면 장사 지내게 된다. 침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어 장사되었으며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이제 여기서 세가지 점을 보도록 하자.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알고 있다.
무슨 목적으로 못박혔는가? "죄의 몸이 멸하"여지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만일 죄의 몸이 죽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섬길 것이다.
만일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면 죄의 몸이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길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 각자가 해결할 유일한 질문은 죄짓는 것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에게 지금 이 순간에 죄짓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를 원한다는 문제가
영원히 해결된다면 죄를 결코 짓지 않을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죄를 섬기는 일에서 자유스럽게 되는 길은 오직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죄를 선택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와 죽음을 선택하는가? 죽음을 택하여 죄를 면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죄도 택하고 죽음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죽음을 피하고저 하는 자는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죽음을 만난다. 죽음을 선택하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죽음의 길은 곧 구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희생을 치르셨다.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가? 참으로 죽기를 원하는가? 누구든지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결정하고
그의 손에 영원한 카드로 들고 그의 생애의 매순간마다 죽는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죽음은 즐거운 것이 아니고, 옛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의 선택으로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나 죽이는 사람에게는 쉽다.
이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쉽고 이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죽음을 영원히 계속하는 것은 더 쉽다.
언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언제 우리를 그의 영광 앞에 흠없이 세우는가? 지금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길은 죽음의 길이다. 지금이 죽음을 선택할 때이다. 지금이 우리 자신을 영원히
죽음에 넘겨주는 때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뒤로 물러나고 죽음을 피한다면 무엇에서 피하고 있는 것인가?
구원에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죽음과 같이 보이는 곤경에 처하는 어떤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를 섬기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종은 그리스도의 기쁨을 생활화시킨다. 왜냐하면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기쁨과 지속적인 평화와 만족감은 여러분과 나에게
이르러 올 수 있는 모든 죽음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억지로 하는 힘든 일이 아니고 일찌기 없었던 가장 웅대한 일이 된다.

십자가의 죽음, 그후부터는 죄를 섬기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
왜 그러는가?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롬 6:7) 주님에게 감사하자.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나와 여러분의 생애에서의 유일한 질문은 나는 죽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죽지 않았으나 이 죽음을 가져오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면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 유일한 결과이며
그리고 그것은 이 모든 댓가를 치룰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역시 다음 구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1절에서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의미한다. 2절에서도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의미한다.
6절에서는 우리가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7절에서는 죽은 자는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며
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디에서 사는가?
의 가운데서 사는가? 그렇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사는가?(회중: 의 가운데서 산다) 매우 잘 대답했다.
그러면 로마서 6장의 1-2절과 6-8절은 모두 우리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9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어떻게 해서 죄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는가? 죄 때문이다.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알지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바 되었다. 그때부터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는 영원히 죄와 모든 죄의 결과에 대하여 승리하셨다.

그러면 이 구절은 여러분과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그와 함께 일어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그러므로 9절과 10절 역시 우리가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11절에서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와같이 그는 우리가 죄짓지 않게 될 것을 말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헤의 지배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초월하게 하여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하며 죄의 권세를 거스리고 우리를 죄짓는 것에서 구원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같이 로마서 6장 1-14절에 이르기까지 거듭거듭 죄와 죄짓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전파하고 있다.
이것은 큰일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더 나아가야 할 일이 있다.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 6:2)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때에 누구에게 순종했는가? 하나님에게 순종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를 섬기기 위하여 자유롭게 된 그의 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애에 어떤 공백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지성적인 섬김이 있을 것이며 그 결과는 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죄짓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우리가 의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도록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크게 외치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그러한 것이다. 이것을 인하여 감사드리자.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주님에게 감사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셨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직 다 된것은 아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여러분과 나의 경험에 호소하신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이것을 보충해 보자.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는 의에 대하여 자유한 죄의 종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자유한 의의 종이다.
내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였고 주께서 그 모든 것으로 내 영혼을 먹였으므로 가끔 천사의 노래를
"길게 뽑아내는 선율이 아름다운" 노래라고 말하는 밀론의 시가 생각난다.
이 로마서 6장은 길게 뽑아내는 선율이 아름다운 노래 중의 하나이다.

로마서 6장은 죄로부터의 자유로 시작한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다.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죄짓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것도 위대한 일이다.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의에게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도 위대한 일이다.
다음에 이것에 기초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것도 위대한 일이다.
이 모든 것 위에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길게 뽑아내는 선율이 아름다운 주님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오! 이것을 받아 깊이 생각하고 그 아름다운 음조를
붙잡아서 주야로 우리의 심령 안에 머물게 하라. 그러면 이 노래는 우리의 심령을 선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로서 죄의 몸을 죽게 하고 죄짓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의를 섬기도록 하고
거룩함에 이르게 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함에 이르게 하고 영생에 이르게 한다.

다시 한번 선물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기까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있다는 말씀을 보도록 하자.
모본을 보여 주신 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죄의 세상에서 죄있는 육신 곧 여러분과 나의 육신을 입고 세상의
모든 죗짐을 지고 가신 길-그가 온전함 가운데서 그리고 온전함에 이르도록 가신 길은 우리 앞에 놓인 길이다.

그는 성령으로 태어났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셔서 다시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는 우리를 위하여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그는 죄가 없었지만 죄가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셨다.
그는 살아 계시고 생명의 왕이요 창시자이시지만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셨다.
그의 나오심은 영원전이지만 육신으로 태어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과 내가 거듭날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의의 세계에서 죄의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세상에서 의의 세계로 거듭나게 하셨다.
그가 다시 태어나시고 인성에 참여하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고 신성의 참여자들이 되게 하셨다.
그가 다시 태어나시어 땅과 죄와 인간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서
하늘과 의와 하나님에게 이르게 하신 것이다.

커버트 형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를 형제로 만든다고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형제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셨다.
이것은 성경에 쓰여져 있고 마리아에게 한 말씀이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25)

성령으로 나시고 다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서
이 세상에서 생명과 품성의 장성함에 이르셨으며 거기서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은 온전함에 달했었다.

다시 태어나시고 성령으로 나시고 우리와 같이 혈육으로 나시고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시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었다.(히 2:10; 5:8,9)
이와같이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쓰시고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을 쓴 우리가 온전함에 도달해야 하는 곳은 고난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라나면서 항상 온전하셨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맨 끝만을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그러나 맨 끝은 맨 처음에 도달되지 않는다. 다시 에베소서 4장을 보도록 하자.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이 온전함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에 이를 수 있는가를
여러분과 나에게 제시한 말씀이다. 내가 13절을 읽었는데 14-16절을 같이 읽어보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것은 여러분과 내 안에서 자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이며
하나님의 지혜의 성장이며, 하나님의 품성의 성장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성장이다.
그러므로 이 성장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새로 태어날 때에 인간 안에 심기어진다.
그 사람은 다시 낳으며 성령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심기어져 있으므로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얼마나 많은 일에서인가? "범사에" 자라나야 한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그리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씨가 심기어진다. 밤낮으로 씨가 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씨는 어떠한가? 완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씨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씨는 지금 싹이 튼다.
그 싹이 어떠한가? (회중: 그것 역시 완전하다). 사실인가? (회중: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곡식의 이삭이 아니다. 튼튼하게 서 있는 줄기도 아니다.
이것은 땅 사이에서 갓 나오는 싹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싹은 어떠한가? 그것은 완전하지 않는가? (회중: 완전하다) 성장하는 매 단계도 완전히 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하다. 그렇게 보지 않는가?
더 이상 이러한 잘못된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도록 하자. 그런 생각을 버리라.

그 싹이 땅을 뚫고 나올 때에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좀 더 보라.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이 지상에 일찌기 나타난 잎사귀와 마찬가지로 완전하다.
그러나 겨우 땅에서 기어나온 호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전부이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이기 때문에 완전하다.

하나님은 그것과 관계를 가지신 유일한 분이다. 그렇게 보지 않는가? 이것으로 됐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좋은 씨로 거듭났으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태어나고 그 완전한 씨로 낳았다.
그 씨가 싹트고 자라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특성을 본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완전하시다. 그러면 바로 거기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회중: 완전하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서 거듭나고 하나님이 직접 그 일을 지도하신다면 그 일은 어떻게 될까?
완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점에서
보좌 앞에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신다. 그 싹은 자라서 땅위에 선다.
곧 다른 잎이 나와서 잎이 둘 있게 되며 각각 다른 잎과 마찬가지로 예쁘다. 셋째 잎이 나타난다.
이제는 줄기가 되어 여전히 자란다. 이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정말 다른 모습이지만
그러나 전과 같이 온전하다. 마지막 온전함에 더욱 가깝게 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러나 궁극적인 온전함에 더욱 가까워졌기는 하나 지금 서 있는 모습이 전에 땅에서 나올 때와 같이 온전하다.

때가 되면 키가 더 크다. 이삭이 맺힌다. 그 위에 꽃이 핀다. 그 꽃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마침내 여물고 완전한 곡식 이삭이 나타난다. 곡식 알은 모두 완전하다. 하나님의 일이 거기에서 끝마쳐진다.
완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 시작하셨을 때에 하신 생각을 따라 온전함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성장에 의하여 온다. 그러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샘이므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만이 자랄 수 있다. 그만이 자라나게 하실 수 있다.
그만이 완전한 모본을 안다. 그리스도는 모본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모본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 모본을 따라 온전함 가운데서 자라도록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에서 역사하였던 같은 능력과 생명이 이 성장에서도 역사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인간의 육신을 쓰신 한 어린아이로서 시작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치신 것과 같이 여러분과 나는 거듭나서
모든 일에 그 안에서 자라나서 곧 그와 같이 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할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기를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했기 때문이다.(계 10:7) 우리는 지금 그 날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세상에 전하라고 주신 그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 비밀이 세상을 위하여 마쳐져야 하고 또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들 안에서 마쳐져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그 비밀이 십사만사천인 안에서 마쳐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쓰신 하나님의 일, 육신 곧 여러분과 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일이 마쳐져야 할 것이다.
여러분과 내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마쳐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가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가? 주님의 길이 온전함에 이르는 좋은 길이 아닌가?
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히 6:1,2)
그가 우리를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있었던 불안정한 터에서 해방시키셨다.
유일한 터는 의로 섬겨 거룩함에 이르고 그 마지막은 영생이 되는 터가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맡기면서 심판을 만나고저 하고 그 앞에 설 준비를 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이 일이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오로지 하나님,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표준, 모본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일이
항상 모든 일에 어디에서나 그리고 영원히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담대하라.
처음에나 마지막에나 언제나 그리스도가 되게 하자.(리뷰 앤드 헤랄드 1899년 7월 18일, 8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