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어느 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어느 부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것과 아버지의 간섭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이 이미 아버지의 품을 떠나고자 하는 각오가 되었음을 보고 그에게 돌아갈 분깃을 주었다.
아들은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먼 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껏 허랑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
'이처럼 재미있고 좋은 것을 아버지께서는 왜 금하셨을까?' 라고 생각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재산은 탕진되고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드디어 궁핍한지라,
그 나라에서 가장 천한 직업인 돼지를 먹이는 신세가 되어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흉년은 더욱 극심하여 허기진 배를 채울 수가 없었고,
그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돼지가 먹는 먹이를 뒤지고 먹을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나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돼지들은 자기의 먹이를 빼앗아 가는 줄 알고 사납게 밀어부친다. 절망에 빠진 아들은 그제사 자기가 떠나온,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그곳에는 흉년이 들지 않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일하는 종들이 허다하건만, 나는 이곳에서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으나 아버지의 준엄하시고 분노하시는 모습과,
자신의 잘못을 생각할 때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는, 그의 모든 자존심과 두려움을 압도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돌아가자 아버지의 품으로.... 과거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돌아가자, 아버지 집에는 많은 종이 있지 않는가, 그들 중 하나같은 신분으로 받아 달라고 애원하자,
그저 굶어죽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 굶어 죽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아무리 무섭고 욕심 많은 아버지라도 나를 종으로는 받아 주실지 모른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발걸음은 이미 아버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신약 성경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온 모든 인류를 표상한다.
우리 인류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며 살았어야 하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고
모든 인류가 범죄하며 하나님의 품을 떠나왔다. 하나님을 떠나온 인생들의 모습이 어떤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아버지를 떠나온 둘째아들처럼 방종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모든 인생에게는 흉년이 오는 법, 곧 인생의 늙음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은 말하기를
"나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 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1:12-14.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당하는 흉년이 아니겠는가? 솔로몬은 해학적으로 인생의 늙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날에는 빛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다리에 힘이 없음)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등이 굽음)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이빨이 빠짐)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눈이 어두워짐)...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잠이 오지 않음) 음악을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음성이 쇠하여짐)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도 놀랄 것이며 (힘이 없어 걱정이 됨)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머리카락이 희게 됨)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전12:2-5.
인생의 늙음과 희망 없음을 얼마나 잘 묘사해 주고 있는가?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12:1.

이 모습은 나의 장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 아닌가? 얼마나 가련한 모습인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온 탕자들이여!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영원한 집(무덤)으로 들어가기 전, 창조주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겠는가?

다시금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 중 둘째 아들의 마지막 장면을 들어보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는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15:17-24)라고 이야기를 끝을 맺는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오해하였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자신을 아버지는 호된 질책과 꾸지람으로 대하리라 생각하고
그는 아들이 아닌 종의 한 사람으로 돌아왔노라고 말하면서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올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 마음 앞 동구에 나타난 거지 모습을 한 아들을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왔다.
아버지를 찾아준 아들의 용기에 감사할 뿐 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 '아버지여 이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종에 한 사람으로 받아주소서'라는 아들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직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여 즐기자고 하였다.

아, 얼마나 훌륭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인가? 이 탕자의 아버지는 우리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고(살찐 소를 잡으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상징한 비유이다. 우리 모두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으려는가?
세파에 시달리고 지친 영혼들이여! 우리 모두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고 하시며 우리를 초청하신다.
아버지의 집에서만이 참된 안식과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는 곳이다.